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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Oct 06. 2022

땀 한 바가지, 버럭 한 줌, 꼬릿한 향기의 추억

2W 매거진 28호

2W 매거진 28호 '운동하는 여자들'에 실린 글입니다.

쓰면서 검도를 참 좋아하는구나 새삼 깨달았어요. 이제 집구석에 있는 호구와 죽도들은 유물이 되어버렸지만, 제 맘 속 열정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내년엔 둥이들이 유치원에 갑니다. 아이들의 세상은 더 커져서 엄마를 찾는 일도 조금은 줄어들겠지요? 다시 도장에 설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일단 다 굳은 몸을 어떻게 해야겠어요. 오늘부터 뜀박질이라도 시작해볼까 합니다.








쩌렁쩌렁한 시합 소리와 함께 공기를 가르는 듯한 ‘퍽’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양손으로 죽도를 든 까만 사람이 나르듯 화면을 가로질렀다. 저만큼 가서 몸을 획 돌리는데 머리 뒤로 까만 줄이 공기를 가르며 휘날렸다. 그 장면이 마치 슬로우로 재생시킨 화면처럼 한 장면씩 머릿속에 와서 박혔다. 멋있었다.


“아빠, 나 검도할래.”


중학교 때 우연히 티브이로 시합을 보고 홀딱 반해 내뱉은 한마디에 아빠는 넘치는 실행력으로 다음날 나를 도장으로 데려가 주셨다. 


도복 바지를 허리춤에 묶어 놓은 끈에 끼고 발을 훤히 드러낸 채로 몇 날 며칠 기본이라는 움직임만 연습했다. 발을 십 일 자로 만들고 오른쪽 뒤꿈치를 살짝 든 뒤에 미끄러지듯 자유자재로 움직일 것. 죽도를 들고 연습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거울에 비치는 함께 연습하는 사람이 많아서 누가 누군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어느 순간 양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만 남았다. 고지식할 정도로 물고 늘어지는 면이 있는 나는 포기도 늦어서 손에 물집이 잡히고 발바닥에 멍이 들어가면서도 열심히 다녔다. 어느 순간 호구를 쓰고 항상 부러워했던 사람들 사이에 껴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갈 무렵에는 처음으로 시합에 나갔다.


5킬로는 족히 되는 무거운 호구와 죽도를 짊어지고 시합이 있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이기고 싶다는 마음을 불태우며 시합장에 섰다. 이상하리만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침묵 속에 내가 들고 있는 죽도 끝만 보고 이리저리 휘두르다가 어딘가를 맞고 져버렸다. 집에 와서는 억울함 때문인지 안 하던 것을 해서인지 몸살이 나서 한동안 낑낑거렸다. 아쉬움은 나를 더 검도의 세계로 푹 빠지게 했다.


대학을 가서는 망설임 없이 검도 동아리에 들었다. 좁은 동아리방에 들어갈 때마다 한쪽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도복과 호구에서 나는 쪽 절은 땀냄새에 고향에라도 돌아온 것 같았다. 동기들과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도장에 모여 하루 종일 운동만 하는 것도 좋았다. 목청 높여 소리 지르며 발을 구르고 칼을 맞대고 나면 늘 땀으로 샤워했지만 머리가 맑아지는 개운함에 멈출 수가 없었다.


언젠가 학교 대항 시합에 나가서 결승전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울려 퍼지는 응원을 온몸으로 들으며 상대방의 움직임과 칼 끝에 집중했다. 대전 상대와 서로 눈을 맞추고 움직이는 시간은 황홀했고 틈새를 치고 들어가 점수를 따는 순간 내지르는 기합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올라가는 심판들의 깃발을 보는 것은 짜릿했다. 결과는 아쉽게도 패배였지만 다 끝난 뒤 칼을 집어넣고 퇴장하면서 언제까지고 검도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했다.


강한 다짐은 생각보다 쉽게 잊혀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애지중지하던 나의 죽도와 호구는 찬밥신세가 되어 한국집 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낯선 생활에 익숙해지느라 잊고 있던 검도는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자꾸만 생각났다. 무거운 아이들을 들쳐 매고 뛰고 안았다 내렸다 하며 나의 뼈를 든든히 받쳐주는 근육들에서 죽도를 꼭 쥐고 있는 힘껏 상대방을 내려치던 때가 떠올랐다. 더운 여름 아이를 애기띠로 매고 용을 쓰다가 침과 땀으로 범벅된 냄새가 훅 끼쳐올때면 도복과 호구에서 나던 꼬릿한 향이 생각났다. 말 안 듣는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점점 소프라노톤으로 이야기하다가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어디 가서 꽥 소리 지르고  싶을 때는 도장에서 내 지르던 기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아. 다시 하고 싶다.’


둘째가 유치원에 가고 드디어 검도를 시작해보자고 근처 도장에 견학을 가려던 찰나였다. 둥이가 생기면서 나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 언제 견학 올 거냐는 메일에 답변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제 내년이면 그때의 둥이들이 유치원에 간다. 다시 한번 꼭 검도를 하고 싶다고 이번엔 반드시 찾아가겠노라고 연락해야겠다. 그동안 굳어버린 몸들을 좀 풀어줘 볼까.


다시 흘릴 땀방울들과 목청껏 내지를 기합, 호구와 도복에서 느껴질 누군가는 코를 잡을 그 냄새들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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