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Jan 12. 2023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보다 보니

저 파랗고 빨간 것은 무엇이냐

바람이 쌩쌩 부는 날이었다. 집안이 냉장고처럼 춥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바람은 불지 않아서 이런 날은 역시 밖에 나가는 것보다 안에 있는 게 좋다. 옷을 몇 겹 껴 입고 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한잔 손에 쥐고 있으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여기에 복슬복슬한 실내용 양말까지 신으면 금상첨화다.


내가 저녁을 담당하는 날이라 식재료가 필요했다. 미리부터 준비하려고 했다. '내일 가야지' 앞에 오만 핑계를 대다 보니 기어코 저녁 만드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어느 날은 쌍둥이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어느 날은 고기를 미리 사 두면 상할까 봐. 기다리다 보면 기적처럼 아이들을 할머니가 봐주고 나만의 시간이 날 것만 같기도 했다. 운전대를 잡고 신나게 달려 잽싸게 싸고 괜찮은 물건이 잔뜩 있는 슈퍼에 다녀올 수 있는데... 늘 남편에게 소박하다는 말을 듣는 꿈을 꾸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날짜만 갔다.


마음이 급해졌다.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는 둥이들을 꼬셔서 산책을 빙자하여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얘들아, 우리 산책하러 가자~"


"밖!!"

"가자~"


평소 같으면 신이 나서 옷도 갈아입기 전에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뒤도 안 보고 달려갈 아이들이었다. 웬일로 반응이 뚱했다. 감기가 걸려 콧물을 줄줄 흘리느라 연신 혓바닥을 날름 대던 선둥이는 그렇게 좋아하는 산책을 마다하고 가지 말라고 했다. 요 며칠 날짜가 바뀌도록 놀다 자느라 느지막이 일어난 후둥이는 잠결이라 그런지 싫다고 딱 잘라 말하고 다시 이불속을 찾는다.


꼭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급한 마음 탓에 몸까지 들썩 거렸다. 나는 어느새 온몸을 흔들며 나가자고 아이들을 꼬시고 있었다. 나가면 재미날 것처럼 좀 더 목소리를 띄워야 했는데. 춤을 추고 있는 몸과는 달리 목소리는 다그치느라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싫은 아이들이 바닥에 들러붙은 엉덩이를 떼어 줄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가야만 하는 것을. 나는 개학 첫날이라 학교에서 일찍 오는 첫째와 둘째를 이용하기로 했다. 잘 먹는 과자와 동영상으로 얼렁뚱땅 유인했다.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몰려들었다. 그 사이에 큰 아이들에게 슈퍼에 가고 싶다는 말을 빙 둘러 설명했다. 혹시 나간다는 것을 쌍둥이가 눈치채면 계획이 말짱 도루묵이 되기 때문이다.


"잘 부탁해..."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미리 다른 방에 준비해 둔 외투와 장바구니를 챙겼다. 살금살금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발끝으로 튀어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바람이 대충 걸친 외투 속으로 휘몰아쳤다. 2겹이나 겹쳐 있는 옷이 무색하게 벌거벗고 서 있는 듯한 느낌에 외투를 부여잡고 부르르 떨었다. 억지로 쌍둥이를 데리고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찬바람 맞으며 흩날리는 콧물을 핥아대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최대한 빠르게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이 자꾸만 빨라졌다. 생각 같아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며 바람처럼 달려갔다 오고 싶었다. 열심히 땅을 구르는 것과는 다르게 성큼성큼 나아가는 느낌은 없고 숨만 차올랐다. 앞은 왜 뿌예지는지.


안경을 썼음에도 바람은 방어할 것 없는 눈동자로 사정없이 들이쳤다. 시림을 참을 수가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살 것 같았다. 내려오는 눈꺼풀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아 걸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뜬 눈으로 자꾸만 물이 차 올랐다. 앞이 뿌예져서 쉼 없이 눈을 깜빡여댔다. 높다란 계단을 내려가 슈퍼가 보이는 길로 들어섰을 때였다. 저 멀리 슈퍼의 주차장 풍경이 눈물 속에 둥둥 떠올랐다.


하얀 차 위로 파랗고 빨간 것이 보였다. 순간 경찰차와 구급차가 서 있는 건가 싶었다. 무슨 일이 생겼는 줄 알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보통 사이렌이 울릴 때는 번쩍 거리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빛과 함께 윙윙 소리가 들리던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귓속에 패대기치듯 들이닥치는 바람소리만 시끄러웠다. 사고라도 나서 조사 중인 줄 알았다.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줄 요량으로 눈에 고인 물을 연신 닦아대며 실눈을 하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점점 슈퍼가 가까워지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얀색 봉고차 같은 네모진 차가 파랗고 빨간 자판기 앞에 주차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들으면 동그래진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달려들만한 일은 아니었다. 경찰차와 구급차를 동시에 봤다면 그건 정말 대 사건이었을 텐데 말이다. 어디 나가면 뭐든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는 쌍둥이들 시선이 나에게도 옮은 모양이다. 쌍둥이는 '하얗고 네모난 차는 구급차, 빨간 차는 우체국 배달차, 사이렌이 울리면 일단 구급차' 하는 식으로 세상을 본다. 이제 보니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쌍둥이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나를 깨닫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맘에 함께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순수한 시선이 숨어있었나 보다.


매일 아이들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들여다봐야겠다. 내일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 것들이 보일지 정말 기대된다.

작가의 이전글 땀 한 바가지, 버럭 한 줌, 꼬릿한 향기의 추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