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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Jun 21. 2023

후회

먼지 냄새나는 밤이었다.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수국은 어딘지 빛이 바랜 것 같았다. 역사상 최고로 건조한 장마라고 연일 뉴스에서 떠들어댔다. 동네에 논이라는 논은 죄다 모내기를 망쳤다. 비가 오지 않아 기껏 심어놓은 벼가 누렇게 떠버리고 말았다. 논두렁에 대 놓은 물속에 있어야 할 다슬기도, 개구리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쩍쩍 갈라진 땅이 물이고 뭐고 다 삼켜 버린 것 같다. 늘 밤만 되면 합창을 해 대던 그것들이 없으니 조용하다. 조용하다 못해 무섭다. 


여기는 읍내에서 오는 버스가 논두렁이 시작되는 마을 입구까지 밖에 들어오질 않는 시골 촌 구석이다. 내려서 30분은 족히 걸어야 집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 집은 특히나 제일 안 쪽에 있어서 밤늦게 나갔다 들어오려면 고역이다. 매번 전화로 누굴 부를 수도 없고. 택시를 타고 들어가는 것은 웃돈까지 얹어 줘야 해서 일도 안 하는 나에게는 꿈같은 일이다.


지난번 읍내 친구들과 노느라 정신이 팔려 늦게 들어오던 날. 홀로 논두렁을 걸으며 얼마나 뒤를 흘낏거렸는지. 발을 헛디뎌서  논두렁에 몸뚱이를 쳐 박을 뻔했다. 다행히 비쩍 마른땅 덕에 별일은 없었지만.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고풍스러운 시계가 6시를 알렸다. 우리 집 시계는 매 정각마다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울림소리가 집 전체를 흔든다.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치지만 바꿔 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싫어하는 사람도 나뿐인 것 같다. 듣기 싫은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언제나 6시에 정확히 밥을 먹는다. 오늘은 엄마가 일을 마치고 늦게 돌아오시는 바람에 준비가 늦어졌다. 늘 같은 시간에 밥을 먹던 몸이 시간을 기억하고 배꼽시계를 천둥처럼 울려대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엄마의 앞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밤 같은 어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처음이었다.


“엄마. 무슨 일..”


“딸. 엄마 회사에서 좋은 일 있었어. 이거 봐. 엄마가 맛있는 거 사왔지롱. 오늘은 특별한 저녁이 될 거야.”


엄마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박수까지 치며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흔들어 보였다. 읍내에 새로 생긴 유명 셰프의 요릿집에서 사 온 요리였다. 내가 지난번에 가보자고 졸랐던 곳이었다.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흘러나왔다. 뱃속에서 얼른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엌으로 따라 들어가 저녁 준비를 했다.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오렌지와 건포도를 듬뿍 넣은 샐러드를 만들었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이 샐러드는 나의 최애 중 하나였다. 침이 고이는 것을 삼켜가며 오렌지 껍질을 까고 건포도를 넣었다.


접시에 담긴 요리들을 식탁 위로 옮길 때였다. 냉장고를 뒤지는 듯하던 아빠가 물병을 식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여서 잘 들리지가 않았다.


“지하에 가서 와인 한 병 골라올래.”


“뭐..”


아빠는 내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옆구리를 툭툭 찌르며 지하로 가는 문 쪽으로 밀어냈다. 난 지금 밥 먹을 준비하고 있는데? 울화통이 터졌다. 사실 어두컴컴한 지하가 싫었다.


“아 뭐야. 오빠는 뭐 하는데. 저기 앉아서 텔레비전 보고 있네. 오빠 보내! 야! 지하에 가서 와인 가져오래!”


아까부터 소파에 들러붙어 있는 오빠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남들은 밥 준비한다고 이리저리 바빠 죽겠는데 눈골 시리게 떼굴대는 꼬락서니 하고는.


종이가방에 들어있던 요리를 그릇에 옮기다 말고 엄마가 나에게 달려왔다. 


“딸. 엄마가 사 온 거 되게 맛있어 보이는데 시식 좀 해봐.”


“아니 같이 먹을 건데 무슨 시식이야.”


엄마는 아빠와 내 사이를 가로막으며 어깨에 팔을 얹고 나를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아빠의 눈빛이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같이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 앉는 순간이었다. 벨이 울렸다. 아빠가 벌떡 일어났지만 엄마는 매서운 눈빛으로 재지 하며 현관문으로 나갔다. 누구세요라고 묻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아빠가 나를 잡아 끄는 것과 거의 동시에 검은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를 들쳐맸다. 


허리를 두르고 있는 팔을 떼어내려고 밀어내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우리 집 거실에서 현관문이 이렇게나 멀었던가. 나. 아직 밥 입에도 못 댔는데. 아까 시식하라고 할 때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빠가 와인 가져오라고 할 때 조용히 지하로 내려갔으면 좋았을 텐데. 좋았을 텐데... 모든 순간이 후회스러웠다. 


아빠가 나를 떼어내려고 달려왔다. 언제 다가왔는지 거기엔 엄마가 있었다. 현관문을 빠져나가기 전 엄마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마워 우리 딸. 엄마가 잊지 못할 거야.”


아빠의 고함소리가 메아리처럼 따라왔다.


“서우! 사랑하는 우리 딸! 널 기우제 따위에 재물로 보내버려서 미안해! 이놈의 촌 구석. 미쳐 돌아가는 촌 구석이 제 목숨 건져 보겠다고 널... 서우야!”


이름을 불러대는 아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저녁 준비를 할 때 아빠는 계속 내 곁에서 날 어떻게 해보려고 했었다. 눈물이 흘렀다. 길가에 핀 수국이 눈물에 부풀어 올라 탐스러워 보였다. 오래전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을에서 오래전에 기우제를 한다고 산 사람을 받쳤다는 이야기. 그거. 진짜였구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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