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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Aug 17. 2022

그날, 나는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

둥이들이 아직 뱃속에 있을 때에는 그저 나오면 편해질 줄 알았다. 첫째와 둘째 때의 만삭의 배 크기를 훌쩍 넘어서 어디까지 크는지 보자는 듯한 기세로 부풀어 오르는 탓에 나도 모르게 길을 걸을 때면 배 밑을 받치기 일쑤였다. 앉아 있어도 아이들이 눌러대는 건지 명치가 위로 눌리는 느낌에 자세를 어찌 잡아야 할지 어정쩡하게 바꿔대느라 바쁘고 일어나도 밑으로 쏠리니 불편한 건 마찬가지. 있는 대로 숨을 들이쉬어서 뱃속을 크게 만들면 좀 나을까 싶어서 심호흡을 해보지만 이미 커진 배는 공기가 조금 더 들어간 것 가지고는 부풀지 않았다. 풍선처럼 바람을 불어넣는 대로 커지면 얼마나 좋을까.


무거운 배를 하고도 첫째와 둘째 덕에 저절로 움직이게 되어 운동 걱정은 없었다. 쫄래쫄래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둥이들을 품고 있을 때에는 마침 첫째가 초등학교, 둘째가 유치원을 다녀서 육아를 시작하고 처음 맛보는 '나 홀로 타임' 이 생겼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가만히 있으면 참을 수 없이 졸음이 밀려와서 가끔 둘째의 유치원 버스 마중을 잊을 때가 있었다. 참고 참다 하필 버스가 오기 직전에 잠이 드는 것은 뭔지. 같은 버스정류장에 마중을 나가는 엄마들이 열심히 메시지와 전화로 아이가 돌아옴을 알려주지만 잠귀가 어두운 탓에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웃기는 건 잠이 들었다가 꼭 버스가 지나가고 난 직후에 헉! 하는 느낌에 깜짝 놀라서 깬다는 것이다. 타이밍이 5분만 빨랐어도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다른 친구들을 보며 둘째가 유치원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다행히 마중 시간을 어찌 넘긴다고 해도 아이들이 집에 와서 게임을 하고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찾아온다. 하루 중 가장 힘든 고비의 시간이다. 대부분 아이들 옆에서 뭘 하나 구경하던 나는 데굴대다가 위로 올려지지 않는 눈두덩이의 무게를 못 이겨 드러눕고 만다.


"30분만 잘게."


단골 멘트를 날리며. 보통 30분은 1시간 혹은 2시간이 되고 당연한 일이지만 아이들은 날 깨우지 않고 하던걸 즐기느라 바쁘다. 낭패다. 늘 '왜 아직도 게임하고 있어' 이런 식의 말을 하며 멍한 머리를 꾸역꾸역 들어 올리고 나면 하루가 다 가고 어느새 저녁 준비할 시간이 돼있다.


평일이 그러니 주말에는 어찌 돼었든 나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말은 안 하지만 아이들이 게임이나 유튜브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 감추어져 있다. 


그날은 오랜만에 결혼해서 첫째를 낳을 때까지 잠시 살았던 동네로 산책을 가기로 했다. 가로수로 심어진 벚꽃이 멋지게 피어나는 곳이었다. 슈퍼가 있는 건물 옥상에 주차를 하고 산책을 하다가 괜찮은 곳에서 도시락을 먹자며 돗자리를 집어 들고 출발을 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발그레한 벚꽃잎을 잡는다고 폴짝 대기도 하고 바닥에 가득한 꽃잎을 발끝으로 휘젓기도 하며 아이도 어른도 즐거웠다.


산책을 마치고 주차료를 대신하기 위해 슈퍼에서 먹을 것을 조금 사들고 차로 돌아가는 우리들은 갑작스레 불어오는 돌풍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아까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하루 이찌방인가? (일본에는 봄에 '하루 이찌방'이라 불리는 돌풍과도 같은 바람이 분다.)' 어른인 나도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아서 발가락에 힘을 꼭 주는 판에 작은 아이들이 어찌 될까 싶어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둘째의 손을 잡고 있던 나는 남편에게 연신 첫째 잘 챙기라고 외쳐댔던 것 같다.


바람이 연신 귓가를 때려대는 통에 외치는 말이 튕겨나가는지 서로 무어라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서로 마주 보고 뻥긋 대는 꼴이 꼭 물속에서 밥 달라고 입을 뻥긋 대는 금붕어 같았다. 수조 속 금붕어도 사실 뭔가 말을 하고 있는데 물속에 흩어져서 내 귀로 말이 들어오지 않았던 걸까. 생뚱맞은 생각도 잠시.


아이들을 먼저 차 안에 태우고 싶은데. '찰칵, 찰칵' 이런. 바람에 눌려서 문이 열리질 않았다. 하필 우리 집 차는 문이 2개밖에 없는. 그래서 뒷좌석에 타려면 앞문을 열고 앞 좌석을 접은 다음 쑤시고 들어가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도 빨리 차 안으로 대피하고 싶었지만 아이를 태워야 가능했다.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고개를 들어 찾으니 슈퍼에서 산 것들을 트렁크에 넣으려고 트렁크 문을 열고 있었다. 바람을 등지는 곳에 아이들을 서 있게 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쿠당탕!' 뒤에서 커다란 솜방망이 같은 것이 강타하는 것 같은 느낌에 다리가 휘청 거려서 비틀대고 있는데 어디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바닥을 살펴보니 맥주캔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6개들이 팩을 트렁크에 넣으려다 바람에 떨어져 버려 종이로 된 팩이 찢어져버린 것이다.


'아이고'


계속되는 바람에 저만치 굴러가는 아이가 눈에 들어와서 잽싸게 달려가 발로 잡았다. 커져버린 배 때문에 몸을 접어서 주워 올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차장에서 물건이 굴러다니다가 다른 차가 밟거나 하면 위험할 것 같아서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캔을 가지고 기세 등등하게 돌아가는데 이번에는


"위험해!"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푸드덕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뭔가 싶어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반짝이는 천 쪼가리 같은 물체가 보였다. 별게 다 날아다니네 하는 생각을 하며 차 쪽을 돌아보는데 남편이 손에 들고 있는 돗자리 넣는 투명 가방이 보였다. '돗자리였어!?'


여기는 주차장 옥상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며 자유를 향해 날아오른 저 돗자리가 밑으로 떨어지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서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큰일 났다는 글자가 전구에 불이 켜지듯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우!!!~' 였던가? '아!!!~~' 였던가 아무튼 괴성을 지르며 돗자리를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준 덕에 날아가던 돗자리는 자유를 찾지는 못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나는 또 발로 다른 곳으로 밀려가기 전에 잡는 데 성공했다. 해냈다는 생각과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오면서 방금 전 괴성을 지르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지만 다행히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돌풍 덕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어서 금세 잊어버릴 수 있었다.


차로 돌아온 나를 가족 모두가 대단하다는 말과 함께 반겨주었다. 남편은 몸도 무거운데 그렇게 빨리 뛸 줄 몰랐다며 감탄의 눈을 하고 칭찬해주었다. '네가 뛰면 나보다 더 빠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차 옆에 멍하게 서 있던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을 태우려고 열리지 않는 문을 열려고 있는 대로 힘을 주는데 이번에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서 벌컥! 하고 열리는 통에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아이들을 태우는 데에는 성공했다.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문을 꼭 잡고 서 있는데 어찌나 웃음이 나오던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발가락에 힘주고 서 있는데 배에는 힘이 저절로 들어가서 둥이들이 밑으로 내려올 것만 같았다. 


조수석에 올라타고 낑낑대며 온 힘을 다 해 문을 닫고는 덜컹대는 차 안에서 우리 모두는 서로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 신나게 불어대던 바람이 허파에라도 들어가 버렸나. 뭐 어때. 신나면 장땡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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