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자의 주도성'의 실체

어린 학생들에게 학습자 주도성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by 신승엽

배움은 어떻게 일어날까?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무관심? 사교육이 만연한 현대사회의 실태를 축약한 문장이지만 웃픈 현실이다.


농담을 벗어던지고 진실로 조건을 들어보겠다.

뛰어난 교사? 몰입이 가능한 학습환경? 자질이 훌륭한 학습자? 모두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하나만 선택하라면 '학습자의 자질'을 택하겠다. 여러분들도 수긍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학습자의 자질은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일까? 본성인가? 양육인가?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결국 양자가 모두 학습을 위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니다.


다시 모두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학습자는 어떻게 해서 배울까? 아니 조금 다르게 표현해서 '어떻게 하면 학습자에게 배움이라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일까?'

이것도 감히 답을 제시해 보겠다. 바로 '학습에 대한 동기'다. 어떤가? 여러분도 수긍하지 않는가?

그것이 '외적 동기'이기보다는 '내적동기'라면 더욱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학습자의 타고난 자질과 노력, 그리고 훌륭한 교사, 좋은 환경 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훌륭한 교사고 좋은 환경은 무엇인지 조금 더 엄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후에 다루고, 지금은 학습자의 자질, 그중에서도 '학습에 대한 강력한 내적 동기'를 지닌 학습자의 최우선 자질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을 관찰하거나 인터뷰해 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공부를 잘해야겠다는 절실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고학년, 상급학교로 갈수록 두드러지는 현상인데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서 의도와 목적에 관여한다고 하는 전전두엽의 활성화와도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뇌과학자나 심리학자, 교육학자 중 일부는 전전두엽이 발달하지 못한 어린 학생들에게 학습에 대한 내적 동기의 발현은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내적 동기의 형성을 위해 학습을 관장(管掌)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배움의 역사를 과거로 돌려 보아도 이와 같은 '내적 동기' 형성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증거들을 찾을 수 있다.

'철이 들었다'라는 표현은 학습이 아닌 영역에서도 인간이 되어간다. 인격이 형성되어 간다.라는 의미로 흔히 쓰는 관용표현이다. '철이 들다'의 어원은 1. '계절 변화의 이치를 깨닫다', 2. 밝을 철(哲)에서 기인한 사리 분별이 가능한 상태 등 명확하지 않지만 어떠한 '기준'에 진입해 이르렀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알을 깨다'와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도 뜯어보면, 정해진 어떤 기준(외부의 세계)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어떠한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알 속의 세계는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영역이고, 알 밖의 외부 세계는 문명을 이룬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기에 그곳으로 인도해야 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자기 지식을 만들어간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나 마음을 경건하게 하여 이치를 추구한다는 '거경궁리(居敬窮理)'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일정한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배운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배움을 위한 내적 동기를 가졌다는 심적 상태는 철이 들었다와 일맥상통하게 쓰이고, 철이 들었다는 것은 그 어떤 요인보다 학습의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 강력한 동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부모나 학습을 코칭해 주는 수많은 분들의 노력은 이와 같은 배움을 위한 자발적 '내적 동기'를 스스로 형성하기가 힘이 드니, 소위 시간관리를 해주고, 공부할 내용을 적절하게 배분하고 제공하며, 우수한 교사에게 배우게끔 해주는 등의 세팅(setting)을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끊임없이 '외적 동기'를 제공하고 자극한다.


"네가 이번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원하는 것을 사줄게", "대학만 들어가면 여행을 보내줄게"와 같은 식의 자극을 지속적으로 가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적 동기로 이어지기를 내심 기대하고 희망한다. 오히려 이런 학습 독려자(?)들이 들이대는 외적 동기가 과하게 되면 의도하지 않은, 삐뚤어진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우리는 왕왕 본다. 그러한 부모님이나 학습 독려자들의 기대치를 어린 학생들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스스로 좌절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저항하기도 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욕망을 욕망하는 타자의 욕망을 눈치 빠르게 캐치해내고는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결과를 기대하고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교육열이 아니 입시열이 강한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서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런 증상이 전염되어 있는 실정이다. '오호통재라!'


다시, 학습자의 내적 동기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공부를 하고 싶게 끔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수업의 장면에서 이런 고민의 실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학습자들이 스스로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손을 들고 발표하고, 먼저 나서서 하고 싶은 공부의 주제를 제안하고, 학습의 과정이나 방법 등을 설계하고 실천하는 등의 행위 말이다. 인간의 내면은 들여다볼 수 없기에, 내적 동기가 그래도 어느 정도 형성되어 움직인다는 것은 학습자들의 말과 행동, 표정으로 읽어낸다.

우리 부모님들은 학교 공개에 날에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서 다른 아이들을 보지 않는다. 내 아이가 손을 들고 무슨 말을 하는지,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 어떻게 학습에 임하는지를 보기 위해 그 바쁜 시간을 할애하여 학교로 간다. 수업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아이를 보면서 부모는 초조해한다. 학습에 참여되거나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 배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 현장에서는 최근 '학습자의 주도성'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또 유행처럼 왔다 사라지는 말일지 모르지만 '학습자의 주도성'은 배움이 일어나기 위한 이상적인 조건이며, 배움이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검증가능한 결과로써 인식된다. 그런데 학습을 주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다 큰 어른들도 자기 주도적 학습이 어려운데 경험이 일천한 어린 학생들에게 주도성이라...? 내적 동기 이외에도 학습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힘은 배경지식이다. 즉, 학습에 대한 기억, 경험이다. 이것은 또 다른 학습의 원료로 사용되며 다른 영역이나 주제, 교과로 전이(轉移)된다.

정리해 보면 학생들이 전전두엽이 발달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내적동기의 형성은 어려운 일이고 게다가 배경지식과 학습 경험이 많지 않아 더 힘든 일이 아닐까 싶다. 물론 학습에 더욱 민감하고 전적으로 몰입하는 시기이기에 기민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편적인 학생들은 학습의 내용, 즉 문화와 역사로서 이미 완성(?)된 교과의 내용에 입문되어야 할 어린 이 들이다.

그렇다면 '학습자 주도성'은 허황된 주장이고 돌연변이적 현상이란 말인가?

아니다. 학습자 주도성을 이끌어 가는데 조건이 되는 변수는 분명 있다.


이 부분은 다음에 논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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