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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al Aug 22. 2020

옛 집과 새 집 사이

이직와 이사와 이주, 아직 진행 중

국경을 넘나드는 이사는 역시 쉽지 않다. 지난 번이 쉬웠던 건 아마도 내 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거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이사가 마냥 쉬울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제법 번거로울 거라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유럽의 여름은 일보다는 바캉스가 우선인, 어떤 부분이 멈춰있거나 천천히 흘러가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시기다. 그 시기에 다른 나라로 이사를 한다는 점을, 아무래도 내가 가볍게 여겼던 것 같다. 


긴 이야기 짧게 해보자면, 회사에서 추천한 이삿짐 센터를 이용했다. 릴레이 같던 이 사람 저 사람의 휴가가 내 이사 계획을 제대로 망쳐놓았고, 내 짐은 내가 없는 집에서 다른 사람이 포장하는 걸 확인해주는 걸로, 그리고 원래 받고 싶었던 날짜로부터 거의 3주가 지난 시점에 이삿짐이 도착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내 돈으로 하는 이사가 아니라 할 말은 없지만 이 이사 비용이 어마어마한 건 비밀이다. 이 이사를 처리하기 위해 서명한 문서만 몇 개인지, 작성한 엑셀 문서만 몇 개인지. 아무튼 이사에 좀 질린 상태라, 지금의 새 집을, 새 직장을, 새롭다고 하기엔 좀 애매한 이 나라에 정을 붙여보고자 노력할 예정이다. 


그래, 제목은 집인데 말하고 싶었던 건 집과 집 사이, 바로 지금의 나와 어딘가에 있을 짐들에 대한 이야기다. 짐들은 바다를 건너고 있거나 고속도로 위에 있을 테지. 나는 이곳에 아주 단촐한 23KG 수트케이스 하나와 노트북과 다이어리가 든 백팩 하나를 메고 도착했다. 말이 23KG지, 그 안에는 첫 출근용 깔끔한 옷 두 세 벌에, 머그 하나, 커틀러리 1인분 등 약 2-3주를 생활할 만큼의 짐도 같이 들어있었다. 수트케이스 자체가 하드케이스라 살짝 무거운 건 괜히 강조하고 싶어진다. 


이사 일이 정해진 게 비행기 타기 전날이어서, 아무래도 2주… 실제로는 3.5주 동안 써야 할 품목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예를 들면, 인터넷이 없을 것을 대비해서 (하필 인터넷 설치에 약 한 달이 걸리는 그런 나라에 제가 왔지요…) 한국어 책 1권, 영어 소설 1권, 그리고 킨들을 준비했으나, 가져온 종이책들은 다 읽었고 읽으려는 킨들은 배터리가 간당간당. 킨들 충전용 케이블은 사실 여러 개가 있는데, 모두 함께 이삿짐 상자 속에서 나에게로 천천히 오는 중. 그럴 줄 알았으면 넷플릭스 다운로드라도 넉넉히 받아오는 건데, 왜 하필 다운로드 받아진 건 진지한 다큐 2개. 그나마 하나는 이미 봤다. 나머지 하나는 아껴두는 중. 머그도 제일 좋아하는 걸로 딱 하나 챙겨왔는데, 너무 졸렸던 저녁 손에서 미끄러져 제대로 깨지고 말았다. 고로, 없는 거나 다름 없는 그런 컵. 샐러드 만들어 먹으면 되겠다 싶어서 샐러드 소금을 챙겨왔는데 오이 썰 칼은 생각을 못해서 식사용 나이프로 썰고 있는 건 덤이다. 고민을 하긴 했는데 제대로 안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의 아주 좋은 예.


어찌됐든 이렇게 사는 3.5주가 나에게는 미니멀 라이프의 연습인 셈이다. 미니멀 라이프는 필수적인 용품을 최소한으로 두고 살아가는 방식일텐데, 지금 나와 함께 있는 것들이 과연 필수적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답하진 못하겠다. 사실 이삿짐을 싸면서 내 자신한테 살짝 질렸었다. 뭐가 그렇게 많은거야. 특히, 옷! 특히, 신발! 특히, 냉동실 속! 가구를 안 사도 되는 곳이었어서 다행이지, 가구까지 내가 직접 채웠어야 했다면 그 큰 집을 어떻게 꼭꼭 채워서 살았을지 안 봐도 비디오(요즘은 유튜브였던가요…)다. 무서운 건 지금 집부터는 가구를 내 것으로 채워야 하는데... 더더욱 다음 이사는 생각하기 싫어진다. 이쯤 되면 나에게 미니멀 라이프는 무엇일까 또 이야기해봐야 할텐데, 나의 오래된 지인이라면 내가 말하는 저 단어에 무조건 웃고 만다. 나에겐 다이어트와도 같은 미니멀 라이프. 암튼, 이 이야기는 잠시 접자, 슬퍼지니깐. 


한국에서 살 땐 그래도 괜찮았는데, 다시 학생이 되고 외국인으로 살아가다 보니 구매 결정에 있어 나의 패턴은 아무래도 효용과 가성비였던 것 같다. 그래서 세일이라는 요소에 매우 관대했었고, 당장의 필요에 높은 가중치를 뒀었다. 예를 들면, 지금 내가 킨들로 책을 자유롭게 읽고 싶다면 나는 킨들용 케이블을 하나 사면 된다. 비싸봤자 5-10유로? 예전 같았다면 책 한 권 값인데 더 많은 책을 읽고 당장 내 시간을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고민하지 않고 샀을 것 같다. 지금은 좀 다르다. 3-4개나 있는 그 케이블이 배달 중인데, 잠시 불편하다고 물건을 사진 말자는 생각. 불편함에 너무 톨러런스가 낮아지진 않았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그리고선 환경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생각해본다. 이 모든 걸 생각하고선 킨들 배터리가 죽기 전까지 떨리는 마음으로 한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를 맛보는 중. 겸사겸사 떠나기 전 이 나라를 추억하고자 굳이 그 나라 브랜드로 옷과 그릇들을 제법 산 건 말하지 않겠다. 딱 10유로짜리 예만 들어야지, 쓰면서도 부끄러우니깐. 


옛날 집과 새 집 사이. 옛날의 나로부터 새로운 나를 만들기 좋은 시간. 되고 싶었던 내가 있었다면 시도해보기 좋은 공간. 생각의 속도가 빠른 편이고, 그러다 보니 하룻밤 길게 생각하고 나면 어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버릴 만큼 진도가 나가있다. 게다가 그런 결정에 따른 추진력도 제법 빠른 편. 이 장점이자 단점이 지금의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음은 자명하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내 성격 중 하나기도 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 생각을 좀 적어내려가면서 내 삶의 원칙들을 확고하게 세워나가고 싶다. 쇼파에 누워 휘뤼릭 해버리는 생각으로 저건 좋아, 이건 별로야 같은 호불호 말고, 정확하게 이야기해나가고 싶은 진짜 의견들. 하루하루 마주하는 작은 결정들도 다 투표라는 이야기가 참 와 닿는다. 가끔 내가 믿는 나와 실제 행동하는 내가 다를 수도 있겠구나,를 타인을 보면서 한다, 나라고 다를까 싶어서. 그래도 최대한 그 간극을 줄여나가면서 믿는 대로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역시 오늘도 다짐이네. 근데 이사온 새 집에서, 퇴사하고 1주일 후 + 곧 새 회사 입사 1주일 전, 국가도 옮겼겠다, 이런 상황에서 다짐 안 하면 도대체 언제 다짐하겠냐고. 


사실 떠나오고 새로이 도착하는 날 그날 비행기에서 핸드폰에 쓴 일기가 따로 있다. 아쉬움과 설렘이 같이 있는 그 일기는 철저히 나만의 것으로 남겨두고, 겉도는 집과 짐 이야기를 남겨보는 35도의 저녁, 이렇게 더운데도 쎄한 느낌이 드는 여름의 끝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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