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조금 새로워져 봐도 좋을 것 같은 기분
바쁜 2주였다. 일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퇴근 후 시간에서 새로운 것들을 시작했다. 날씨가 좋았고 또 좋지 않았다. 이제야 좀 새해 느낌이 나는 것 같은 건 아마도 어둡고 추운 겨울에 얹어두었던 변명들이 더 이상은 갈 곳이 없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말하길 드라마를 한창 보는 시기가 지나면 책이 한참 읽고 싶다가 어느덧 사람이 만나고 싶어지는 그런 주기라는 게 있다는데, 나는 책이 좋아지는 주기에 들어선 듯하다. 책과 함께 마시는 위스키가 다시 좋아졌고, 슬플 때보단 기쁠 때 술이 더욱 생각나는 타입이라 요즘 계속 위스키와 책이 번갈아 영향을 주면서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지금 사는 곳의 장점은 한 300미터만 걸어가도 하이킹 코스가 있다는 점. 큰 도시가 아니다 보니 도시 중심부에 살면서도 이런 자연과 가까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에 Komoot이라는 앱을 받았는데, 이 앱은 아웃도어 활동의 종류에 따라 적합한 루트를 찾아주고 난이도와 유저 리뷰를 제공해주는 앱이다. 우선 멀리 나갈 것 없이 주변에서 가볍게 주말 낮에 해가 좋으면 할 수 있는 것들로 25km 자전거 타기와 10km 하이킹을 먼저 시작했다. 계속 집에 있으면 그 존재를 알 수 없던 "열심히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 비타민D가 뭐 별건가 싶게 햇볕을 마음껏 즐긴다는 점, 작은 성취가 엄청 달다는 점이 참 좋다.
지금 사는 동네는 부활절 휴가 전까지 현재의 락다운 상태를 이어간다고 한다. 부활절이라고 달라질까 싶은 마음이 한켠에 있어, 여름엔 나아지겠지 같은 괜한 기대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을 낭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늘어지지 않게 밖으로 많이 돌아다녀볼 예정이다.
한국에 살 때는 장마철이 아니고서는 크게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았었는데 여기선 맨날 날씨에 일희일비하는 게 왜일까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나에게 영향을 주는 환경이라는 게 날씨와 자연이 전부여서지 않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큰 도시에 살아도 내가 그 환경과 happening하는 흐름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내 마음이 있는 곳이 결국 집인 것과 같은 유럽의 삶에서, 다시 한번 나에게 중요한 가치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알 듯하면서도 매번 잘 모르겠는 내 취향과 선호도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고, 중요한 결정은 너무 맑은 날이나 너무 우중충한 날에 내리지 않기라는 룰을 정해 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싶다.
한국에 다녀오고서는 나도 모르게 잠시 삶에 힘을 주게 되었는데 다시 힘을 빼면서 지금 좋은 걸 하면서 살기로 마음을 다시 돌렸다. 심심한 곳에서 심심할 시간이 많게 살아가는 게 마치 전신 마사지를 받는 것과 같은 건 좀 과장인가. 마사지 이전과 이후가 진짜가 아니라 마사지 자체가 삶인 건 또 뭘까.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를 재밌게 읽었다. 인종 문제와 빈부 격차 같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섬세하면서도 어떤 사건과 장면으로 대립하는 두 집단의 의견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신선했다. 여러 부분들이 마음에 들었고 생각을 곱씹어보게 만들었지만 그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오늘은 소수자가 말하는 소수자의 이야기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작가라는 직업이 고통도 글로 써서 팔아먹는 직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작가가 어떤 특수한 경험과 남들과 다른 시선을 갖게 되는 건 글을 쓰는 사람에겐 매우 큰 자산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인종, 성별, 경제력, 사회적 소속집단이 아닌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멋있게 써내기란 쉽지 않다. 흠, 다시 말해야겠다. 그런 작품이 울림이 있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인종의 문제는 더 어렵다. 백인이 아시아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제대로 된 글을 써 내려가기가, 첫째 쉽지 않을 것이고, 둘째 용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목소리가 밖으로 들려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꾸며내 내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만큼만 들려주는 사람들도 있다. 한때 바람의 딸이 썼던 여행기가 그렇고, 나이 많은 남자 작가들이 생리에 대해 쓴 얼토당토않은 글을 읽었던 시절이 그렇다. 소수자는 아니지만 <에밀리 인 파리> 같은 드라마가 아직도 성행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수 있겠다.
해외살이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이민자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시작은 영국에서 한 <The good immigrant>와 미국편 <The good immigrant USA> 중 몇 편을 다시 읽었고 다시일지 모르는 여러 부분에 공감했다. 이번에 읽으면서 같이 분통 터지는 기분을 느꼈던 글은 Chooey-Booey and Brown이라는 에세이였다. 온갖 인도 음식들을 가져다 놓고 커리라고 부르는 기만적인 서양인들의 태도라든지, 요리책에 인도 고유의 재료를 chooey-booey하고 brownish하다는 식으로 대충 써버리는 so called 전문가의 행위 같은 걸 이야기할 때, "내말이!!!" 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것. 그리고선 전통음식에서 나는 냄새에 신경쓰게 되고, 자기들 맘대로 해석한 정체불명의 요리들이 대도시 골목마다 새겨나 내 것을 빼앗아가는 것에 어이가 없고, 무신경하고 게으르며 결과적으로 나쁜 "너는 분명 커리를 좋아할 거야" 같은 말을 들으며 왜 기분 나쁜 지를 되짚어봐야 하는 그런 마음들에서도 잠시 멈추었다. 나도 아직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할 만큼 복잡하면서 어려운 내 경험과 문화가 너무 쉽게 납작해져 버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어버리는 그런 과정을 겪은 소수자라면 누구라도 경험해봤을, 그래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이번 2주 동안에는 글은 아니어도 목소리를 열심히 내던 두 분이 이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다.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웬만해서는 그 두터운 방음벽을 뚫고 다수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소리가 들려온다는 건 목소리를 내는 분들의 노력, 그리고 다수의 일부가 끊임없이 그 벽에 조금씩 균열을 내는 노력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전부터 계속 생각해왔던 건데, 다들 제멋대로 '이상'해져서 정상이라는 범주가 그저 하나의 표본 혹은 작은 군집이 되는 순간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그래서 저 사람 왜 저래 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되게. 실제로도 내 주변만 봐도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상'한데, 도대체 어느 누가 그 정상성을 규정해서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인지 너무 화가 난다.
이것과 또 다르게 날 불편하게 했던 건, 영화 <소울>을 엄청 재밌게 보고 나서 들었던 한 영화 팟캐스트였다. 왜 백인이 '다양성' 영화를 본 것처럼 이 영화를 평가하지 싶을 정도로, 게으른 백인들의 <기생충> 영화평을 봤던 것만큼 묘하게 불쾌한 이야기였다. 이 의견을 담아 메일을 보내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번 시도해보려고 다시 듣다가 엉뚱한 부분까지 거슬리기 시작해 다시 듣기와 메일 쓰기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가 비백인이라고 인종문제에 자유로울 수는 절대 없다. 아니라면 한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인종차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모든 사람은 차별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일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은 이렇게 평범하다. 대학교 때 친하게 지낸 친구 중 하나가 중국인 언니였는데, 이 언니는 대학에서 내가 만난 어떤 이보다 넉넉하고 어른인 사람이었다. 내 첫 가까운 외국인 친구였던 그 언니와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얼마나 뇌가 해맑은 사람이었는지를 아주 가끔씩 알 수 있었고, 지금 반대의 경험을 하고 살아가면서 부끄러운 언행들이 그보다는 좀 더 자주 생각나 여러모로 쭈글쭈글해지곤 한다. 그리고선 이 기분을 까먹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많은 것들의 기준이, 특히 예술 분야에 더 두드러지듯, 서양의 것이라고 해서 그들 중심의 감상과 평론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내 것으로 만들어 소화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증거일지도. 이렇게 잃어가는 글들과 글쓴이들이 늘어갈지라도 어쩔 수 없다. 게으름의 결과는 이렇게 처참하다.
나의 이 소수자로서의 경험 그리고 고통은 어떤 걸 낳게 될까. 적어도 그들이 그려낸 이야기에 내 작은 기억들을 살짝 보태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다는 점, 그 경험의 조각들로 다른 약자들이 처한 입장에 대해 좀 더 이해해보려 시도라도 한다는 점, 게으른 사고의 결과가 얼마나 비루해질 수 있는지를 보았으니 계속 뒤돌아봐야 한다는 점들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하지만 이 또한 나를 편견에의 위기나 건방지고 쉬운 결론의 위험에서 자유롭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오늘도 읽고 쓰고 말을 뱉고 또 주워 담지 못할 그것들을 보며 부끄러움과 함께 반성하는 수밖에.
식단 조절 같은 걸 안 한 지 거의 3년이 넘은 것 같다. 다이어트를 강요받는 것도 싫었고 보이는 것에 너무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아무래도 한국을 떠나 있으니 거기서 자유로웠던 것도 있다. 운동은 그래도 꾸준히 이것저것을 시도해보는 과정을 거쳐왔고 체력은 매우 좋아졌다. 하지만 늙어가는 장기들이 소화할 수 있는 양은 줄어들어가고 생각 없이 먹던 것들은 자꾸 잉여가 되어 몸에 쌓여가는 것을 더 이상은 방치할 수 없어 식단 조절을 시작했다. 우선 시작은 양을 줄이고 먹고 마신 것들을 기록하기. YAZIO라는 앱을 활용하고 있는데, 간헐적 단식 및 물 마시기 기능까지 함께 되어 있어 즐겁게 입력하며 사용하고 있다. 이런 앱들은 칼로리와 영양분을 자동으로 끌어오는 데이터베이스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건 유저의 크기와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게 뇌피셜인가요?) 제법 유명한 이 앱으로 시작하길 잘했다 싶고, 요즘 열심히 사용하는 Thermomix의 레시피들의 정보도 다 나와있어 여러모로 만족스럽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측정하기 시작하면 해결된다. 진짜 챌린지는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가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얼마나 먹고 얼마나 마시고 얼마나 운동하는지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배운 건, 1) 생각하지 않고 먹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고 2) 물을 하루에 2L를 마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며 3) 애써서 움직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요즘 같은 매일매일 재택근무는 건강에 굉장히 해롭다는 것, 4) 그리고 이런 작은 승리들이 하루를 생각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점.
그래도 나의 디그니티를 위해 건강의 마일스톤을 한껏 줄어든 몸무게거나 안 맞던 청바지 입어보기 대신, 좀 더 긴 시간을 숨차지 않고 달려보기로 정했다. 아무래도 삶의 대부분을 그렇게 외모 강박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걸 아무렇지 않게 만들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듯하다.
여전히 시작하는 기분이 좋다. 주문한 책이 도착해서 표지를 넘기고 첫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책을 다 읽은 것 마냥 만족스러운, 나는 그런 사람. 당분간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을 테니 새로운 이야기들이라도 많이 접하고 싶고, 다 공감하며 살 수는 없어도 누군가를 선 밖으로 밀어내버리는 일은 없도록 성실히 지경을 넓혀가고 싶다. 얼마 전부터 듣기 시작한 정밀아의 앨범이 좋고,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가사가 아름다운) 음악만을 듣는 시간을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가져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