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 증후군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게다가 그 혼자인 내가 그리 꼼꼼하진 또 않기에 이런 내 사적인 계획에는 항상 구멍이 있고 나는 그런 구멍들에 대부분 아무렇지 않게 대응한다. 어쩔 수 없지. 하나에 차질이 생기면 도미노처럼 이어진다. 그래서 일정을 하나둘씩 수정했고, 제일 먼저 미룸 리스트에 넣은 게 이 격주정리. 나와의 약속도 약속인데, 매번 제일 먼저 발로 치워버리는 게 마음이 별로다.
이번에 이사 온 집은 할머니 누나의 집에 한 할아버지 동생이 렌트 프리로 살면서 전혀 관리가 안 되다가 코로나 시기에 케어홈으로 들어간 할아버지의 가족들이 리노베이션을 한 뒤 다시 할머니의 딸들에게 관리를 맡겨 렌트 시장에 나오게 된, 아마도 1970년대에 지어진 집이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거의 전혀 관리를 안했었고 할아버지의 가족들이 제대로 리노베이션을 해서 넘기지 않아, 미국에 거주하면서 세입자를 관리해야 하는 할머니의 딸과 나는 매일매일 작은 문제를 같이 해결하며 집을 다시 up to date 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변기를 새로 갈고 전기 배선을 늘리고 모든 탭들을 가는 일들을 사람을 불러 하고 있다. 어제는 세탁기의 탭에서 물이 졸졸 새는 걸 발견했고 오늘 아침에는 발코니 문 반만 열기가 제대로 안 되는 걸 알게 되었다. 아주 빠르게 대응해주는 할머니의 딸 덕분에 큰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집에 계속 사람이 살면서 관리하는 것의 중요성은 뼈저리게 배우고 있다. 어차피 아직 부엌이 들어오지 않아 어수선한 데다가 옷 행거는 천장이 너무 높아 사용할 수 없어 침실도 아직 박스 투성이다. 겸사겸사 내 마음도 같이 어수선에 동참하고 있다.
이번 이사하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회사 동료들과 파트너들이 와줬고, 심지어 내 상사는 건장한 아들까지 데려왔다. 커다란 운반용 밴에 고리로 거는 수레까지 가져와 모든 걸 완벽하게 도와주고 갔다. 온갖 툴과 자기 장갑들까지 가져와서는 능숙하게 가구를 다 분해해서 차에 싣고, 도착해서는 여기저기에 불도 달아주고 안전에 대한 설명도 해주고, 이사 당일 배송된 냉장고와 세탁기 설치까지 다 해주고선 맥주와 샌드위치로 간단히 배를 채운 뒤 다들 떠났다. 점심을 거하게 제공하고 싶었는데 지금 같은 시기에 9명이 앉아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고마운 마음을 작은 패키지로 보냈고 (우리 팀 스피릿을 생각하면 샴페인이었어야 하는데 주류는 연령 제한 때문에 곧장 주문해서 선물하기가 쉽지 않더라고) 부엌과 모든 게 다 갖춰지면 그때 모두를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과 부즈들을 대접하기로 했다.
이사뿐 아니라 여기저기 크고 작은 부분에서 수많은 도움을 받고 살고 있다. 한국에선 도움을 받을 일이 거의 없었다. 도움은 주로 사는 곳이고, 부모님과 살았으니 특별히 내가 책임지고 할 일들이란 게 거의 없었다. 그래서 도움을 받는 위치에 있는 게 익숙지 않다. 모르는 사람들한테 받은 도움도 참 많다. 밤기차가 뜬금없이 멈춰서는 어떻게 집에 갈지 몰라 걱정하고 있을 때 걱정말라며 자기 친구를 불러 나를 집앞까지 태워다 준 고마운 노부부도 있었고, 처음 도착했을 때 현금이 없어 커피를 못 사먹고 있는데 대신 돈을 내준 뒷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다 보면 누군가의 선행으로 연명하는 것 같기도. 이젠 그래도 도움에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이제 겨우 알게 되었다.
외국인으로 현지어를 잘 못하며 살아가는 건 언제나 깍두기인 것 같은 기분이다. 쿨하게 그래 난 깍두기를 인정하고선 살아가는 것도 방법인데, 다 내 뜻대로 되는 (줄 알던) 삶을 살다가 온, 비대한 자아를 가졌던 나는 아직도 저 타협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이걸 내 맘대로 깍두기 증후군이라 불러버렸다. 이건 비단 현지어의 문제만은 아니다. 생활지식이 전무하다. 안전하게 전등을 갈고, 새로 배달된 세탁기에 있는 운반용 안전핀을 제거하지 않으면 세탁기가 신내림을 받을 수 있고, 수도들이 적당량 물이 차있지 않으면 하수구 냄새가 역으로 올라올 수 있고, 침대는 문을 바라보도록 놓은 게 좋고, 배가 아플 땐 카모마일이 좋다는 뭐 그런 것들. 해봐야 하는 건데, 의외로 이 나이 먹도록 이 분야론 해본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닫는 과정은 그리 즐겁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도 잘 해내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깍두기에 어리버리한 나는 이렇게 이번 2주간 또 많은 걸 배웠다. 그중 가장 큰 배움은 바로 이것: 도움을 주기로 기꺼이 나선 마음은 감사히 받고 잘 활용하되, 정확하게 감사를 표하고 기회가 있을 때 나도 남을 돕기. 지금 처한 입장이 깍두기여도 내 인생 전체가 깍두기가 아님을 기억하기.
9월인가 10월까지 없을 빨간 날과 징검다리 휴가를 잘 즐기고 오늘 저녁에 맞을 백신을 기대하며, 저는 곧 찾아올 전기공을 맞이하고 다시 집정리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럼 늦었지만 그래도 제출한 숙제를 내려놓고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