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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모든 쌀국수들에게

by 은섬


※ 제목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원제 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에서 영감을 받아 변형한 것입니다. 본문 내용은 해당 작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쌀국수 어때요?”

좀 전 나왔던 우동에 비해 반응이 좋다. 2시간여의 독서회가 끝나고 점심을 먹을 식당을 찾을 때만 해도 다들 의견이랄 게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온 메뉴에서 좋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주차하기 좋은 곳이란 이점이 더해져 우리 모두는 쌀국수 식당으로 향했다.


푸짐한 쌀국수에 칠리소스와 굴소스를 뿌리고 있을 때 습관적으로 처음 쌀국수를 먹던 때가 떠올랐다. 이 음식을 내게 처음 소개한 사람은 대학교 동기였다. 그때는 서울에 쌀국수 전문점이 하나둘 오픈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면요리를 좋아하는 내게 쌀국수는 이색적이면서도 질리지 않아 오래 즐길 수 있는 음식이었다. 졸업식 날, 지방에서 올라온 가족들에게 내가 한턱낸 음식도 쌀국수였다.


쌀국수는 밀가루 국수와는 다름없어 보이지만, 그에 비견할 수 없는 장점이 있다. 국내에 유통되는 밀이 대부분 외국산이라서 그런지 밀가루 음식은 소화가 안 된다는 말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쌀국수를 먹으면 속이 불편하지 않다. 면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엄연히 쌀이 아닌가. 그리고 확실히 밀가루 국수보단 시간이 지나도 배가 덜 고팠다. 더 든든했다.


내가 처음 갔던 쌀국숫집의 분위기는 꽤 고급스러웠다. 쌀국수에 반주를 시키는 직장인들을 나는 다소 동경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 저것이 어른의 삶이구나! 그러나 이후 쌀국수 전문점들이 프랜차이즈 형태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러면서 음식점의 분위기도 밝고 캐주얼해지며 주 소비층이 변화했다. 그 어디에서도 과거처럼 희미한 불빛 아래 은밀한 분위기를 다시 찾을 수 없었다.


나와 쌀국수를 가장 많이 먹은 사람은 단연코 남자친구였다. 둘 다 여유롭지 않던 시절이라서 그와의 쌀국수 식사는 꽤 데이트다운 데이트였다. 그와 헤어진 후에도 사귀는 남자마다 쌀국수 음식점에 데려갔다. 그러다 보니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찔렸다. 몇 년 전 베트남에서 오리지널 쌀국수를 먹은 후 약간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이젠 고수를 넣어 먹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전만큼 쌀국수를 많이 먹진 않아도 역시 한 번씩 먹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럴 때마다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 내게 그 음식을 알려준 친구 H였다. 그와 나는 같은 학과라는 점을 빼곤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는데도 신기하게 새내기 시절 바로 친해졌다. 그때 내가 입었던 검은색 힙합바징 대한 그의 칭찬으로 우리의 관계가 시작했다. 나에겐 H만큼 친한 친구 무리가 있었지만, 어쩌면 그도 그랬지만, 두 무리는 절대 섞이는 법이 없었다. 그저 우리 둘만 친했다. 그래서 H가 더 특별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쌀국수 주문을 그에게 모두 일임했다. 그는 언제나 쌀국수를 2그릇이 아닌 쌀국수 하나에 추가 사리를 주문했다. 그땐 그게 이상한 줄 몰랐다. 쌀국수는 그렇게 주문하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걸 누구 코에 붙일까 싶지만 그 당시 단 한 번도 양이 적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여전히 미스터리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쌀국수 한 그릇을 함께 먹었다. 국수를 건져 먹은 후 칠리소스 때문에 붉어진 국물도 사이좋게 나눠 먹었을까?


물론 그와 매번 쌀국수만 먹은 건 아니었다. 나를 스파게티 음식점에 처음 데려간 것도 H였다. 중국집 앞 골목에서 그가 나오길 기다렸던 기억도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렇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봄밤의 숲 속 공원에서 일어났다. 사진 한 장처럼 기억된 그때. 나의 시선은 코 앞의 그가 아닌 높은 곳에서 우리 둘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희뿌연 빛을 내뿜은 가로등이 선 놀이터는 학교 후문에서도 한참 산길을 걷다 보면 나타나는 곳이다. 봄밤, 그곳에 그와 내가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적요가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조심스럽게 내어 놓았는데, 이날 나는 처음으로 그의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영어를 원어민처럼 했기에, 나는 그가 경제적으로 여유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었다. 나는 놀란 속을 달래며 괜히 그네 아래 노인 발로 모래를 툭툭 쳤다. 그 밤, 그가 꺼내놓은 사소한 진심으로 나는 이후 우리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실 같은 걸로 이어졌다고 믿게 됐다.


이후에도 그는 시간을 쪼개어 내 곁에 잠깐씩 머물렀다. 내가 졸업할 땐 폴라로이드를, 눈이 올 땐 깜짝 방문을, 내가 먼 곳에서 새 삶을 시작했을 땐 자신의 레시피로 만든 된장찌개 수제 밀키트를 선물했다. 한결 같이 따뜻한 기억이었다. 마지막 연락은 지난 가을이었다. 나의 책을 e북으로 모두 읽었다며 짧은 감상평을 전하는 H의 위치는 외국이었다.


다시 우리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날이 올지 헤아려본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애틋한가? 그는 내 젊음의 목격자요, 내 젊음을 이야기로 만들어준 청중이었다.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아 다행이다. 그랬다면 연락은 커녕 아름다웠던 추억조차 빛바래버렸을 테니까.


우리의 연락이 언제 다시 닿을지 그도 나도 알지 못한다. 이대로 끊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상심하진 않을 것 같다. 쌀국수를 먹을 적마다 생각나긴 할 것이다. 타인에게 오롯이 귀하게 여겨졌던 그 시절이. 그러면 나의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지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싶어질 것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충분하다.



**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photos/noodle-soup-pho-vietnamese-cuisine-80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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