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30분 걷기에서 만난 뜻밖의 풍경
걷는 걸 좋아한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오가는 버스비를 아껴서 불량식품 사먹으려고 걸었던 것에서 시작된 나의 걷기는 이제 건강을 위한 하루 30분 걷기로 이어지고 있다. 하루 30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시간이란 생각은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데 도움이 된다. 저녁 먹고 걸어도 부담없는 30분짜리 3km 코스도 마련해 두었다. 육아에서도 가사에서도 잠시 퇴근이라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걷는 시간이 휴식이다. 습관적으로 빨라지는 걸음에 슬쩍 브레이크를 걸며 여유를 즐긴다.
매일 걷던 길이 조금 지겨워 새로운 길을 걷고 싶다는 호기심은 평소 눈여겨보았던 길로 나를 안내했다. 기존의 나의 걷기 코스는 신호등을 몇 번 건너야 하는 도시 속의 평지였지만, 새로 도전할 길은 오르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길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평탄해지더니 카페를 지나고 가든을 지나고 교회를 지났다. 누가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은 곳에 이렇듯 정성을 기울였을까? 누군가가 남몰래 쏟은 정성에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길에서 만난 길냥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잠시 나의 길벗이 되어주었다. 길은 처음처럼 마음의 준비가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끝을 맺으며 산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산 중턱의 커다란 나무를 보고 온 터였고 그곳에 대한 궁금증을 유예할 마음이 없었다. 나무가 있는 곳을 향해 게처럼 옆으로만 이동하자 누군가 만들어놓은 허술한 벽이 나타났다. 나는 기꺼이 몸을 낮추고 때론 까치발을 하며 그 벽을 넘었다.
그곳엔 겨울에 걸맞지 않은 초록의 들이 펼쳐져 있었다. ‘견우야~ 나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가봐’ 내지는 (눈밭이 아님에도) ‘오겡기데스까’를 외쳐야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초목이 바싹 마른 겨울인데도 오밀조밀 모여 있는 풀들과 파나 마늘처럼 겨울을 이겨내는 초록 농작물들은 대번에 눈을 시원하게 했다. 그리고 그 밭들 사이에 몇 백년은 족히 되었을 고목이 이 땅의 주인처럼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래 서낭당도 보였다.
지금은 아파트숲이 익숙한 도시이지만 어느 지역이나 그렇듯 이곳도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가던 곳이었다. 그때였다면 고목이 마을을 지켜 준다고 믿었을 것이고 그 아래 서낭당을 지어 더 많은 염원을 담았을 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는 외지인의 유입이 많은 도시인 탓에 나는 지금껏 이 고장이 깊이는 얕고 무게는 가벼운 도시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아파트숲 이전의 시간을 상징하는 고목과 만나다니 이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겨울의 중심, 마음 안에서는 작은 열기가 피어 올랐다. 과거의 많은 순간이 사진 한 장처럼 기억되어 떠올려지곤 했는데, 거기에 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엔 과실을 주는 나무가 좋았다. 곁을 지날 적마다 밤열매가 후두둑 쏟아져 매번 부러웠던 이웃의 밤나무나 비온 후 잘 익은 열매를 떨어뜨려 내 속을 달게 했던 등굣길 만난 아름드리 살구나무. 서울시청 옆 가로수들의 녹음으로 만들어진 내밀함은 내게 두근거림을 안겨주었다. 부산박물관 내 나무들 아래서 보내는 시간은 다음을 상상하게 했고, 당곡생태학습관 앞 느티나무 한 쌍이 바람에 몸을 떠는 소리는 마음의 결이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 기억에 박제된 그 순간에 존재한 나무들을 떠올리자 그때 그 아래서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고 존재가 가벼워졌던 기분이 파장처럼 그대로 전해졌다.
사람은 100년만 살아도 장수했다고 한다. 웬만한 나무는 몇 백년도 쉽게 살아낸다. 그래서 나는 그 나무들을 보고 있노라면 겸손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 자리에서 수십년을 혹은 수백년을 사는 나무의 마음은 무엇일까?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해버린 마음일까? 그런 단순한 마음 하나로 긴 시간을 견뎌내는 게 가능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떤 시간을 살아왔어도 ‘너는 결국 이렇게 존재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눈앞의 증거가 내겐 하나의 위로처럼 느껴졌다.
내가 받은 위로에 대해 고심하던 중 한 번 더 나무를 찾아가기로 했다. 다시 찾은 그곳은 같으면서 동시에 조금 달랐다. 팽나무는 한 그루가 아니라 무려 다섯 그루였는데, 두 그루는 아래가 붙어 있어 마치 한 나무처럼 보였고 서낭당 뒤편으로 오색천도 선명했다. 적당한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는 위치라 하루 종일 햇볕을 쬘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스크를 벗자 자연을 품고 있는 공기의 내음이 순순했다.
앉은 엉덩이가 감각을 잃을 때쯤 나는 냉이를 캐기 시작했다. 냉이가 뿌리를 드러내자 흙냄새가 훅 끼쳐오고 냉이 향은 은근했다. 요리조리 엉덩이를 옮겨 가며 캤더니 금방 냉이 한 움큼이 모였다. 마음이 복잡할 땐 생각 자체를 멈추는 것이 도움이 되는가 보다. 냉이 뿌리가 하얘지도록 깨끗이 씻어 된장을 풀고 국을 끓여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단순해졌다. 뜨끈한 냉이 된장국으로 속을 덮혀 위로를 받고, 나는 자꾸만 예민해지는 이 마음의 병을 나아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