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확신을 반복하며
사적인 것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오감으로 느끼는 자연의 무언가를 제하면 나를 움직이는 건 대개 사람의 이야기다. (나는 남의 말을 지독히 안 듣기도, 쉽게 혹하기도 한다.) 소설이나 영화의 어떤 인물보다 나와 같은 차원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 쉽게 감응한다. (이 말도 사실 우습다. 따지고 보면 소설과 영화의 어떤 인물도 결국 소설가나 감독의 사적 경험에서 탄생한 것일 테니.)
쨌든 어제는 배우 겸 감독이라는 조디 포스터를 검색하다 2013년 골든 글로브에서 공로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여자 배우로서의 삶과 어머니를 향한 고백을 힘주어 말했는데, 나는 그를 알게 된 지 겨우 10분쯤 되었고 그의 말을 100%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눈물이 찔끔 났다. 어째서 1만 킬로미터도 더 넘는 거리에 전혀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에 이렇게 쉽게 감명받는지. 쉽기도 하지.
나의 일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묻기보다 듣는다. 누군가는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좋은 인터뷰어라고도 한다. 하지만 내가 애써 묻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스스로 더 잘 안다. 그래서일까 조금 게으른 이 인터뷰를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진다. '저 중앙의 무언가를 다뤄야 하지 않겠어?', '세상 돌아가는 걸 알려면 역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지.' 따위의. 요즘은 인터뷰집도 많이 읽는데, 이것들도 똑같다. 어떨 땐 참 쓸모없다 느껴지는 것이다.
사실 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성악설을 믿는다. 그럼에도. 결국 궁금해지는 것은 사람이다. 덮어뒀던 인터뷰집들도 억지로 억지로 읽다 보면 한 번쯤은 가슴에 박히는 문구를 만난다. 그럴 때면 또 물개 박수치며 책 끝을 접는다. 나 같은 인간이 또 있다니! 하는 마음으로. 혹은 내가 설명 못 했던 그게 이거였네! 같은 유레카의 순간. 나는 매일 일과 삶 속에서 이 작은 사적 경험의 공유가 서로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의심하고 또 확신한다.
2018.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