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여기 있게 한 첫 우주

-04

by 숨은 연못

평행 우주 #αKT-D34-23A-BK2T-DJ877-4084-SW1S76-#W1S76F-1SP6MN-345uC31DA-31O-8JG22

이 우주는 2000년대 말 여름에 갈라져 나왔다. (학교일을 하는 사람은 학기단위로 이동을 하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은 한국은 2학기가 끝나는 겨울에, 미국에서는 2학기가 끝나는 여름에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서부의 한 주로 무사히 이사한다.

그전에 근거 없는 선견지명(?)으로 시민권을 진행했든, 에코를 이미 고용하기로 한 정부기관에서 취업비자를 서포트했든, 아무튼 그날, 이삿짐을 싸기 위해 상자를 구하러 나갔다 들어와 보니, 외국인을 처음 뽑아봐서 에코가 미국시민이 아니면 고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전화 메시지는 남겨져 있지 않았고, 며칠 후 잡 오퍼 레터는 무사히 도착을 했고, 그래서 에코는 원래 포지션을 그만둔다고 구두로만 통보해놓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다시 허둥지둥 철회하러 학교에 갔다 오지 않아도 된다.

( 여기서, 이미 새 사람을 뽑아서 다시 허둥지둥 직업을 찾기 시작해서 다행히 아쉬운 대로 찾아낸 직업이 괜찮았던 우주, 그나마 오래 못 가서 다시 옮겨 간 우주 등, 그리고 결국 못 찾아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갈린 우주 등이 갈려 나간다)

우리는 그날 밤 누워 등 돌리고 각자 울다가, 한 밤중에 차를 몰고 나가 5년 전에 이 주로 이사 오면서 끊은 담배를 한 갑 사다 나눠 피우지 않아도 되고, 다시 직업을 찾을 때까지 싸놓은 짐을 그대로 둔 채 그 집에서 1년을 임시로 더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며칠 후 미국에 올 때 가지고 온 목화솜이불은 물론 유홀에 먹던 조선간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시라고는 아침 일찍 길을 떠난다.

알아보고 온 아파트는 직장 가까운 근처였는데, 인터뷰 때는 낮에 잠깐 봐서 몰랐지만 알고 보니 미국의 다운타운 지역은 거주하기는 밤의 치안이 불안했다. 반년 후, 우리는 중심에서 떨어진 교외에 쌈직한 듀플렉스에 약간의 다운페이먼트를 하고(하우징 붐이어서 전체 집 가격의 10프로도 선금을 내지 않고 빚을 내주던 때다 -나중에 이 버블이 터져서 미국은 한동안 불황이 온다) 과감히 이사를 한다. 아직까지 미국의 주택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던 때일 게다.

그리고 다음 해 그 지역에 역대급 대홍수가 나고, 집은 잠기고, 집은 보험처리를 했다지만 얼마 안 되는 가진 돈을 다 잃은 채, 우리는 다시 허름한 아파트로 돌아간다. 아이는 그 주 주립대에 학생 융자를 받아 들어가고, 에코는 격무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눈치를 보며 직장에 다니고, 아이는 취직이 잘되는 전공으로 졸업을 하자마자 취직을 한다. 착하고 영리한 아이는 늘 그렇듯이 행복하고 사랑받으며 자라고, 한동안은 학자금융자를 갚아야 하지만 결혼을 하면 둘이 수입으로는 그 나이 때의 우리보다는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아이가 독립하고도 집 근처에 살 수 있으니 이론적으로는 이 우주와 달리 자주 만날 수 있지만, 에코와 아이 둘 다 이 주와는 달리 대학에 근무하지 않으니, 한국보다는 낫다고 해도 짧은 둘의 직장 휴가 맞추기도 어렵고, 형편도 이 주와는 달리 여전히 넉넉하지 않아 여의치 않다.


나는 역시 '나름' 행복하지만, 우리는 이따금 그때 그 학교를 관두고 지금 이 주정부 잡을 선택하는 것이 옳았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때 그 주의 유난한 인종차별로 입지가 불안해져서 서둘러 새 자리를 찾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그래서 대학 자리를 찬찬히 찾을 수 있었더라면, 그러면 어디 한적하고 조건 좋은 곳에서 높은 봉급으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삶이 있었지 않았었을까.




남편이 그나마 다시 일단 계속 일해도 된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와 한 시름을 돌리고 나서는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가 놀랄까 봐 뭔가 밝은 소리로 둘러대었던 것 같을 뿐 뭐라고 해두었는지 지금도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밤 아이를 재우고 발코니 문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다가, 문득 미국 영화에서 보면 충격을 받으면 독한 술을 한잔 주는 장면이 나오던 생각이 나서, 거기 잡을 갖는 대로 마음먹고 한 병 사다놓긴 했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거의 마신 적이 없는 시바스 리갈을 한 손가락 마디씩 따라 들었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그 얼음을 타지 않은 위스키가 목구멍에 남기는 뜨거운 느낌, 그 말초적인 느낌에 위안을 받던 기억.

우리는 그 담배 한 갑을 며칠에 걸쳐 밤마다 한 대씩 피웠고, 그걸 끝으로 다시 10년이 넘도록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리고 차츰 다시 회복해서 일상으로 돌아갔고, 그걸 계기로 가진 돈을 털어 미루던 영주권을 신청해서 1년이 조금 지나 받았고 -미국 비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나오는' 줄 아는데, 영주권을 받는 것은 까다로운 자격조건과 서류가 갖춰져야 하는 제법 골치 아픈 일이며, 그래도 제대로 된 직업을 찾으면 고용주가 영주권을 알아서 진행해 주는 편이기 때문에 쪼잔하게 미루고 있었던 거고 실제로 영주권을 받자마자 찾은 지금 학교에서 했으면 각개전투하느라 졸인 가슴도 덜했을 것이고 지금 통장에는 약 3천 불이 더 들어있을 것이다 투덜 - 어느 날 에코가 테뉴어 트랙 교수 인터뷰를 받았다며 다녀오는가 하더니,

정신 차려보니 여기서, 미국살이 24년 중 반 이상인 14년 째 살고 있다.


나이 들수록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면 뜻밖에 후회보다는 '다행'이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바래지는 않지만, 남은 시간이 줄어들수록 아쉬운 것은 아쉬운 데로 남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래도 그중 지금 여기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에 '그나마 감사'한 마음이 들게 된다.

그러나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나는 가끔 내가 주인공이 아닌, 나의 타임라인을 벗어난 우주도 들여다보게 될 수밖에 없다.


앞서 내가 나나 남동생을 잃을 뻔한 우리 엄마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사실 무한대의 가능성으로 말하자면 누구에게 무슨 일은 안 일어나려나 마는, 그래도 졸지에 얼결에 아이를 둘이나 어려서 잃은 우리 엄마의 평행우주가 어딘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 이유는 어차피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상상'에는 한계가 있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상상력의 부족이 편리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의 마음은 정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너무 아파서 그야말로 '알 수 없음'을 인정하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알 수 없는 채로 남고 싶을 정도니까.


그래서, 나는 가끔 그렇게 '아이들이 돌아온' 우주를 들여다본다.


그림 : Covered Wagon - Fred Grayson Sayre (1879 – 1939)


이전 09화내가 없는 우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