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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 우주 A #αKT-D34-23A-BK2T-DJ877-4084-SW1S76-54TGV88-catn43-6rPCF32cΩ
이 평행우주는 199*년 가을에 갈라져 나갔다.
나는 대학 졸업을 바로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었고, 다시 준비해서 다른 학교로 편입을 해 졸업은 했으나, 그로 인해 몇 년의 시간을 낭비하고, 당시 여자나이가 취업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다른 제반 부정적 문제들을 경험한다. 이미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당시 대부분의 직업군에서 여자는 결혼하면, 혹은 심지어 나이 들면 '알아서' 직장을 관두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로 인해 내 삶의 큰 그림이 길게 보아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나는 말과 행동에 더 소극적인 사람이 되었으며, 기득권 층에 대한 반감과 약간의 피해의식을 품고 살아간다.
현 우주, 사건 A 개요 :
연극 기획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공연 날자가 가까워져 세트를 세우고 의상과 소품을 준비하면서 대여한 강당에서 리허설도 진행되고 있었던 어느 날 비슷한 시기에 함께 공연 준비로 강당을 나누어 쓰던 음악과에서 호출(?)이 왔다.
과사무실로 갔더니 학과장 방으로 안내해 갔고, 들어갔더니 세 명의 교수들이 우아하게 ( 새끼손가락도 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세워놓은 채로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다짜고짜 우리가 자기들의 피아노를 긁어놓았으니 물어내라고 요구했다. 나는 우리 세트는 합판을 쓰는 것도 아니고 골판지와 천을 썼던지라 그럴 리가 없다고 상황을 설명했고, 그러자 그들은 어디서 교수가 얘기하는데 학생이 말대꾸를 하느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나는 여기에 연극 기획으로 와 있는 거지 학생의 입장이 아니며 그저 우리가 그랬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라고 항변했지만 그들은 우리 지도교수에게 얘기하겠다고 '협박'하며 윽박지르다 나를 '내보냈다'.
나는 바로 우리 과사무실에 가서 벌어진 일을 미리 얘기해 두었고, 심사숙고 끝에 만약 사과하지 않으면 내 학교 생활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최악의 가정을 하고도 사과는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우리 지도교수님의 결정을 기다렸다. 더구나 재수 끝에 들어간 학교였지만, 우리가 잘못하지 않을 것에 대한 잘못도,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할 말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후 과연 우리 교수님의 호출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내 얘기를 다 들으시더니 별 말 없이, 그냥 우리가 다 물어준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나와서 과사무실에 들르니 조교님도 워낙 '그 사람들' 악명이 높다고, 교수님도 다 아신다며 나를 외려 위로해 주었다. 물론 이로 인해 나는 아무런 불이익을 겪지 않았고, 연극도 성공적으로 막을 올렸다.
평행우주 ##αKT-D34-23A-BK2T-DJ877-4084-SW1S76-54TGV88-DoGDn43-6rPCF32cΩ
1년 후 현 우주에서 또 다른 우주 하나가 갈려 나간다. 이번에는 비슷한 일에 반대의 결정을 했던 일로 인해.
B-1
나는 일껏 졸업 전 취직했다고 좋아한 하와이에 본사가 있는 외국인 여행사를 얼마 후 그만둔다. 다시 취직할 때까지 몇달간 돈을 못 번 것 외에는 먼저 직장의 추천서가 필요한 것은 아닌 당시 한국의 취업 환경상 다시 취직하는 것에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로 인해 지금보다는 더 적극적인 사람이 된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피하기보다는 부딛쳐 나가고 그로 인한 크고 작은 결과들을 흡수하며 살아가는 법을 더 잘 익혔다. 어떤 면으로 보아 나는 현 우주보다는 조금 더 '닳은' 사람이 되었다.
현 우주 사건 B 개요 :
나는 회사에사 어느날 상관의 닥달로 협력사에 전화를 한다. 우리가 맡은 아웃바운드 한 팀의 모집이 잘 되고 있는지 확인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투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을 모집하는 일은 그 쪽에서 할 일이니 우리가 관여하는 건 월권이라는 입장이었지만 이사는 그래도 '관리'를 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조심스레, '모집이 잘 되고 있으신지 해서요'라고 말하자마자 그 쪽에서는 아니나다를까 불쾌한 기색이 완연했다.
'아니 그런 것도 제대로 못할까봐 확인을 하고 그래요?'
나는 어영부영 그렇게 알고 있겠다고 말하고 끊었고, 그렇게 보고를 하자 그 상사는 다시 그렇다고 그렇게 그냥 끊으면 어떻하느냐고 큰 일 났다며 막 화를 냈다.
나는 하라는데로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먼저 경험이 기억났고, 그때는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사고에 대해 내게는 '우리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던 거지만, 이건 어떻든 내가 한 일이니까 '내 행동으로 피해가 있었다면' 책임을 지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상관에게 가서 그 회사에 가겠다고 했다. 내가 가서 필요하다면 무릎꿇고 사과를 하겠다고.
그랬더니 외려 상관은 머쓱하게 입을 다물고 일단 두고보자고 일을 마무리지어버렸다. 물론 '큰 일'은 벌어지지 않고 계획대로 일은 진행되었고, 나는 일년 후 퇴사하고 금융권으로 이직했다.
...
온라인 매체로 목소리가 다양해지면서 좋은 점도 있지만 쉽게 비판하고 편 가르고 '생각없이 퍼 나르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한 cancel culture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SNS 플랫폼은 매체일 뿐이지 편집자가 아니라는 입장으로 센서십을 거부함으로 인해, 알 권리와 사생활의 권리와 의사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개개인에게는 가벼운 행동이지만 일파만파 타인의 삶에 미치는 '개구리에게 장난으로 돌 던지기 '효과에 대한 우려이다. 객관적으로 불법적인 행동을 저질러 사과가 마땅한 경우는 그에 걸맞지 않는 어설픈 사과의 내용이나 방식도 문제가 되기 일수고, 민사의 경우는 뒤늦게 사과를 해도 그 피해 정도도 헤아릴 수 없거나 이미 늦은 일도 많아 문제다.
하지만, 사실 동네 반상회도 아니고 그렇게나 복잡하게 얽힌 인간사에 있어서 책임소재는 늘 그만큼이나 불분명할 수 밖에 없다.
가령 정당하게 입은 감정적 피해로 업소에 대해 불평을 하고도 - 법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로 가해를 한 건 아니지만 매우 무례했다든가- 유죄가 되는, 사실적시에 대한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한국에서는, 내 '의견'의 무유죄에 대한 선은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허위사실 적시도, 가령 1 부터 9까지는 모두 사실을 말했음에도10 한가지에 대해서는 내용상 허위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만으로 허위사실 유포로 '유죄'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사실적시 법 때문에 1-9까지는 사실이었음도 지적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진실'은 밝혀지기 어려워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 등 힘 있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얼핏 생각하면 심지어 부화뇌동했거나 '아는 사람 말만 믿고' 비판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것은 마땅하고 간단한(?) 것 같지만, 아는 사람 말을 안 믿으면 누구 말을 믿고 아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누구를 돕나. 남의 말만 듣고,라지만 억울한 일의 국민청원의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사인하는 사람이 어디있으며, 그렇게 사실로 직접 확인한 일만 믿어야 행동을 하면 무슨 일이 진행이 되겠나.
게다가 때로는 일단 자기 면피하려고, 혹은 자기 하나 마음 편하자고 단체의 머리가 쿨하게(?) 사과를 해서 일껏 마음먹고 단체행동을 한 그 구성원들이 난데없이 피해를 보는 수도 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언제나 누군가는 억울하고, 누군가는 억울하지 않은데도 억울하다고 하니, 이 억울한 사람의 말을 들으면 저 억울한 사람이 억울해지고, 저 억울하다는 사람 말을 들으면 이 억울한 사람은 사실 억울하지가 않다. (응?)
잘못하면 사과하는 게 옳다.
'내가 (본의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거나,
내 사과가 상황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 때로는 사과는 긁어부스럼이 된다 ),
그리고, 나 하나 책임지면 되는거면 ( 내가 누군가의 말을 믿고 행동했는데 나 때문에 그 사람에게 사실적시 책임이 돌아가게 될 것 같으면 내가 믿는 사람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
바로 사과 한다. 착하거나(?) 쿨해서(?)가 아니라, 심지어 딱히 사과라기보다, 잘못했으면 '잘못'했기때문에 '잘못했다'고 시인하는 게 옳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저 두 사건으로 ‘사과’의 참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위에 말했듯이, 내가 사과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게 아니라 종종 사과는 사과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A 사건이 A-1의 평행우주로 갈라졌더라면, 그러고도 B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생겼다면 그때 내 행동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A - B-1 로 이어진 우주와 A-1 - B-2 로 이어진 우주는 달랐을 것이다.
대개의 사과는 결국 형량 감량을 위한 반성문 같다고나 할까.
용서할 거면 사과 없이도 용서할 것이고, 혹 내가 사과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사과를 하든 하지 않든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은 바뀌지 않고 관계도 유지하기 어려우니, 사실은 피해보상을 받을 것이 있다면 받고 관계를 끊는 것이 최선이 될 것이다.
대개는, '돈이 아니라 사과 한 마디를 원한다'는 사람도, 그 사과를 조용히 와서 하고 가라는 게 아니라 '남들 앞에서 받는 것'이 중요하다. 진짜 '내가 돈이 필요해서 이러는 게 아닌'게 아니라, 니가 엎어지는 꼴을 보(이)는 게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진심이 아니더라도 진심'임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벌어진 일이 사과를 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용서도 의미도 없고, '남들 앞에' 내 앞에서 조아리는 꼴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망신을 주겠다는 것이다.
위안부 할머님들께 돈보다 사과가 필요하다는 것은 일본이 자신들의 잘못을 만 천하에 인정하고 국제사회로부터 질타를 받는 것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난 후에도 피해가 발생한 사실은 사과한다고 사라지지 않으니 피해보상금도 충분히(중요)지불해야 마땅하지 사과만 가지고는 절반의 승리다. 피해보상도 사과의 일부다.
범칙금이나 벌금은, 애초에 벌어지지 않도록, 혹 잘못했을 경우는 다시 그러지 않도록 계도하는 역할도 하지만, 사과로 풀어지지 않는 부분을 보상해주는 효과가 있다. 사과를 하든 안하든, 사과가 진심이든 아니든, 잘못이 있다면 제대로된 벌을 주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다.
전두환의 범법행위에 대한 추징금이 환수되는 안되든 그것이 직접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으로 돌아간다면 사실 사과 따위는 의미없지 않겠나.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고 사르트르가 말했다지만, 세상에는 사실 정말이지 정답이 없는 게 많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은데 이중잣대를 안 가지기는, 즉 내로남불을 안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안되면 되게하라'는 진취적인 불굴의 기상은 나쁜짓에 쓰이면 편법을 써서라도 밀어부치고 남을 해하면서라도 무리수를 쓰라는 게 되고,
쓸데없이 청하지도 않은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건 나쁘다고도 하지만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회는 인간성이 메말랐다고 혀를 찬다.
자기가 하는 '비판'은 언제나 정당한 목소리지만 비판을 당한게 자기면 조리돌림 당했다고 억울해 하고,
자기가 믿는 뭔가를 지지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파당이 갈려 적이 생겨, 의견을 삼가는 평화주의자들은 회색분자, 박쥐로 비난받기도 잘한다.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가 소중하다고 했다가, 한마디 거들면 누가 물어봤냐 갈길 가시라며 꼰대라고 구박하고,
여러분이 '들어주셔서' 힘을 얻는다고 하다가, 지나가다 얹는 뻘소리에는 '혼잣말'에 왜 상관이냐고 으르렁댄다.
살다보면 남의 슬픈일에 울어주기는 쉽지만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정말 힘들다는 말도 와닿지만, 살다보면 남의 슬픈일에 울어주는게 아니라, 아이고 너는 그만하면 괜찮다 내가 더 불행하다고 늘상 징징거리는 사람도 천지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러든 말든 심드렁 한 사람도 싫고, 아 나도 그랬는데 하고 맞장구로 자기 얘기 하는 사람은 모든 얘기를 자기 얘기로 만들어서 밉다.
그리고, 물론,
남이 내로남불이라고 리트윗하고 조리돌림하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은 대개는 본인도 물론 내로남불 중이다.
나는 지금 '나 포함' 내로남불하는 사람을 비판하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이중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스스로 알고는 있어야' 한다는 거다.
'내불남불'이랄까.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나름 신중하게 고민을 한다고 하면서도, 알고보면 '기준'이나 '철학'도 없이 이중 삼중 잣대로,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순간순간 하루살이처럼 그저 '내키는' 대로 결정(?)하면서 살아왔고, 그렇게 생각하면 '결정'이라는 것이 내가 내린 결정이 아닐 수도 있고, 그것이 산넘고 물건너 바다건너서 나를 여기 이 현 기준 우주에 이르게 했으니 이게 다 누구 책임(?) 내지는 누구 덕인지는 며느리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날씨가 좋아서, 오늘은 '왠지' 물냉보다는 비냉이 먹고 싶어서, '눈이 착해보여서', 얼마나 많은 역사가 바뀌는가.
우리는 과연 스스로가 생각하는 만큼 '착한' 사람인가. 가령, 내가 그토록 증오하여 심지어 죽었으면,하고 가볍게도 내뱉은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죽는다면 그것은 내 탓덕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찜찜하기는 커녕 속이 시원할 정도가 정당화될 정도의 '나쁨'은 어느 정도인기.
모든 것이 관계이고 상대적이라 생각할 때, 없어져도 되는 사람이 있다면 없어지면 안되는 사람도 없는 게 아닐까.
내가 지워진 우주도 엄연히 누군가에게는 모든 게 잘 풀리는 완벽한 우주이듯이.
그림 : Edvard Munch, Love and Pain, 1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