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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니가 없는 우주
평행 우주 #αKT-D34-23A-BK2T-DJ877-4084-SI5T3R-S00n-N75keE-J54TGV88-DDn43Ω
이 우주는 199x 년 봄에 갈라져 나갔고, 이 당시 이 사건 자체는 큰일이 아니었지만 그 결과로 다시 몇 년 후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진다.
재수를 한 바람에 두 살 터울 언니와 3년 사이가 생긴 나는 아직 대학 1학년 말일 때, 졸업을 앞두고 취직을 하려고 여기저기 입사원서를 내고 있던 언니를 따라 199*년 겨울 어느 날 삼풍백화점에 간다. 단 이때는 아직 삼풍 백화점은 다 세워지지도 않았을 때라 허허벌판에 겨우 완공된 을씨년스러운 지하 주차장에서 지원서류를 나눠주고 있었고, 언니 또래의 젊은이들이 추운 날씨에 종종걸음을 치며 착잡한 표정으로 서류를 들고 드나들던 기억이 난다.
이 우주에서 우리 언니는 얼마 후 이 백화점에 취직이 되었고, 기뻐했고, 그리고 1996년 6월 29일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 때 나는 언니를 잃었다. 나는 내가 언니를 말렸어야 하는지, 말린다면 입사 자체를 말렸어야 하는지 이날 출근하는 것을 말렸어야 하는지를 남은 평생 곱씹으며 살아간다.
내가 잠시 연극을 할 때 연출을 했던 분도 아내분을 찾으러 실종자 플래카드를 들고 나온 것을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분은 찾으셨을까. 그분의 우주는 그예 거기서 한번 크게 갈려 나갔을까.
내 밑으로도 보살필 동생이 둘이라 항상 정신없는 엄마 대신 언니는 우리에게는 때로는 엄한, 그러나 든든한 '지도자'였다. 어려서 겨울에 겉옷을 입을 때 안의 옷의 소매를 잡고 입으면 좋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도, 같은 중학교를 다녀서 어느 선생님 과목을 어떻게 공부를 하면 좋다든가를 알려준 것도 언니였고, 이날까지 도대체 딸들과 '민감한' 주제를 얘기하기 어려워하시는 엄마대신 이런저런 성교육(!)과 시집가서는 간단한 요리법을 가르쳐 준 것도 언니다. 지금도 나이 들면 식도도 늙어서(!) 사래가 자주 들린다는 걸 알려주는 것도 언니고, 코로나사태 초기에 다들 마음만 발동 동이던 가족들을 전격 지휘해서 십시일반 마스크를 몇 장씩 구해다가 순식간에 특송으로 부쳐준 것도 언니다.
그 상자를 받아 들고 마스크가 젖도록 흘린 눈물을 언니는 알까.
언니의 동생들 우리는, 엄마 아버지에게 '항상 틀림없는', '언니만큼만 하면 되는' 언니가 항상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고, 그래서 나에게는 언니가 가고 싶었던 대학을 못 간 것도 내 입시실패만큼이나 충격이었고, 언니가 시집갈 때는 언니가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즐겁게 집을 떠난다는 사실이 너무 서운해서 공연히 더 자주 말다툼을 했더랬다.
우리는 항상 살갑게 구는 사이는 아니다. 뭐든 따르기 전에 의문이 많은 (이라고 쓰고 토를 단다고 읽는다) 나에 비해 언니는 뭐든 항상 곧은길을 걷는 모범으로 간주되었고, 성격과 가치관이 딴판이라서 우리는 고양이와 개처럼 서로를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고, 나이 들면서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더 이상 언니라는 이유만으로 참지만은 않는(?) 나와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더구나 내가 미국에 온 이후로 나는 더더욱 가치관이 변했고 우리는 중간지점을 찾기 더 어려워졌다. 나는 여동생과도 매우 다른 사람이 지고 그래서 자라면서 제일 자주 토닥거렸지만, 어느 날 내가 그 아이에게서 '마음에 안 든다'라고 생각했던 점들이 사실은 내가 '못하는' 부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렇게 그 아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관계가 편해졌던 일이 있는데, 우리 언니는 아직도 일단 내가 더 이상 언니를 무조건 언니로 '존경하고 섬기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는 것 같다.
언니, 나 우리 동네 절친 중에 100살짜리도 있어. 나 예전처럼 언니 졸개 하기엔 이제 너무 늙었어. 나중에 언니 90 되면 나 88이야.
하지만 언니, 요즘은 멋있으면 몇 살 차이든 언니라고 부르는 세상인데, 나는 있지, 나이 많은 친구도 그냥 친구면 친구지 '언니'소리가 잘 안 나와.
왜냐하면 나에게 언니는 언니밖에 없으니까. 언니는 나에게 'the 언니'니까.
그 백화점이 무너지지 않은 우주에 살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이런저런 불의의 사건이 터질 때마다 나는 언니가 그날 죽지 않았다는 걸, 그래서 내게 아직도 언니가 있다는 걸 되새기며 새삼 가슴 쓸어내리거든. 그런데, 순전히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시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고 다친 사람들이 이 우주에는 분명 있으니까,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이 있으니까 언니 포함 누구에게도 이런 생각을 말할 방법이 없고 그저 내가 타고 가지 않은 평행 우주의 문을 닫을 뿐이지.
어디서든, 언제든,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그저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거겠지.
'신은 우리가 견딜 만큼만 시련을 주신다'는 멍멍이소리말이 있다.
문제는, 신이 실제로 우리가 '꼭 견딜 만큼만' 시련을 주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어차피 ‘믿는다’는 말 자체에는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다'는 가정이 내재해 있는 만큼 (가령 내 앞에 물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있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그런 악취미를 즐기는 존재를 사랑이라고 믿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그런 신이라는 존재가 있기나 할까까지 생각을 해보아야 하지만 말이다.
나는 누군가 무슨 사고에서 벗어났다고 '신/하늘에 감사'한다는 말을 싫어한다. 그날 그 비행기에 탔더라면-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도, 반대로 혹 그 마라톤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하는 가슴 치는 'what if'의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지만, 사건을 조장한 쪽이 아니라면 이 모두 그저 눈먼 운일뿐인데, 마치 어떤 신이 누구에게는 눈을 감고 누구에게는 손을 뻗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나는 화가 난다.
누구는 신이 너무 사랑해서 일찍 데려가고, 누구는 아주 사랑해서 병을 낫게 해 준다고, 누구는 신이 너무 사랑해서 시련을 주시고, 누구는 열심히 기도를 했더니 들어줬다는,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 억지로 '설명'하는 게 싫다. 힘든 사람에게 다시 짐을 지우는 일이다.
모든 것은 물을 보려면 바다에 가고 나무를 보려면 숲에 가듯, 그저 어떤 '경우의 수를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뿐이지 무엇을 하면 무엇이 된다는 공식은 없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도 있고 못 갈 수도 있고, 걔는 그렇게 '말 안 듣고 속 썩이더니' 요즘도 그렇게 고생할 수도, 그래도 잘하는 거 하나가 잘 풀려서 '신기하게' 잘 나갈 수도 있다. 건강검진을 꼬박꼬박 받으면 병을 일찍 발견해서 잘 나을 수도, 하지만 그렇게 병을 다 낫고 났는데 느닷없는 전염병으로 가족도 못 보고 죽을 수도, 혹 처칠처럼 비만에 담배 피우고 술 먹으며 살았는데 89까지 무병장수할 수도 있다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 옛날에 강남 허허벌판에 자그마한 한옥 한 채 가지고 계시던 게 노후자금 넉넉하게 되어있는 사람도 알고 있지만, 주식시장 상승세라고 영끌해서 산 주식이 악재가 생겨 다 날아갈 수도 있다. 실제 일어난 일이듯이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집을 잃고 이사 간 곳에서 다시 토네이도를 만나 집을 또 잃은 '죽어라 죽어라'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사고란 없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정말 무작위로 일어난 일인 것 같지만, 그날 사고 당사자가 조금 부주의했던 이유가 있던지, 그날 거기서 그런 일이 일어날 조짐이 이미 여기저기 발견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He's just not into you' (한국제목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나 같으면 '그냥 걔는 너 별로야'로 하겠지만)에서, 여주인공이 자꾸만 그런데도 불고하고 잘 된 사례를 들먹이자 남주가 참다못해 말한다.
"그건 그냥 '예외'야."
하지만 사람들은 '예외'의 사례를 더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적은 경우의 수에도 불고하고 이루어낸 '운 좋은' 사례를 믿고 싶어 한다. 그 사례가 거짓말은 아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일이다.
그저 경우의 수가 낮은 일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최선을 다해 '도모'할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도 불고하고 내가 아닌 누군가의 잘못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했지 이유가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게 안되면 운이 안 좋을 뿐이지 설명은 없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운'은 소위 '팔자'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경우의 수' 측면이다. 얼핏 운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아무 힘없이 그저 운을 따라가는 사람들인 것 같아서 희망이 없어 부정적인 생각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회한으로 낭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거기 가지 말걸, 그 사람을 만나지 말걸.
물론 혹시 자기 잘못이 있으면 최대한 책임을 지고,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벌을 받게 하고, 법에 구멍이 있으면 개정하도록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잘잘못을 가려서 되는 것이 아니면 시간과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소를 잃은 후라도 외양간을 고치면 안 고치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어쩌면 운이 따랐을 뿐이기도 한 좋은 일은 곧잘 내 능력 덕으로 돌리듯이 우리 모두 조금 이기적으로 살아도 된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만큼이나 중요한 말은
shit happens.
똥 밟을 때가 있는 거니까요,
이니까.
그렇게 갈라져 나간 우주의 우리는 종종, 아니 대개, 우리의 삶이 갈린 줄도 모르고 떠내려가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었는지조차 생각해보지 못하고 살아갈 테니까.
그리고 지금 문득 옆을 바라보는 순간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언젠가 한 우주에서 누군가의 손을 놓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니까.
그림 : The Siesta by Paul Gaugu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