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빈자리가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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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은 연못

어머님의 빈자리가 빈자리

평행 우주 #αKT-D34-23A-BK2T-DJ877-4084-SW1 S76-#W1 S76 F-1 SP6 MN-345 uC3-6 rSSJ32c-5 UUT96 Zb-yt56Ω


이 우주는 2010년대 초 여름에 갈라져 나갔다.


오랜만에 이모님들과 소풍 간다고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다가 느닷없이 주저앉아 고관절이 부러져 수술을 하셨다는 시어머니의 소식에 3년 만에 우리는 한국에 방문한다.

나는 한 해전 난치병 진단을 받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하면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고, 나이 들면서 이제는 우리 모두에게 남은 시간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미국에 오기 전 시집살이를 하면서 통 듣기 싫어하던 어머니 신세타령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길래, 이번에는 함께 지내는 동안 나름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드리고, 늘 마음과는 달리 가끔 지치는 만날천날 1절부터 4절까지 똑같은 얘기도 그러나 성공적으로 열심히 들어드리고, 따뜻한 말도 마음 써 일부러 해드리면서 잘 지내고 돌아온다.


어차피 당신이나 나나 이러다 말 살이인데 얼굴 붉히지 말자, 하면서.

여전히 이래저래 속만 썩이는 시동생과 수술과 재활치료 동안 드시던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생겼던 어머니의 여러 가지 육체적 심리적 부작용도 맏아들과 집안에 첫 손주였던 아이의 방문으로 많이 좋아지셨고, 아무래도 돌보는 사람이 늘었으니 어머니 병세의 갑작스러운 악화도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우주에서의 에코는, 어느 날 아침 출근 잘 하자마자, 어머니가 혼자 계시다 갑자기 돌아가신 걸 발견하셨다는 아버님의 전화를 받는 일은 없다. 그러니 나 또한, 마침 대학 방학을 맞아 바로 며칠 전 집에 온 아이와 오늘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까 즐겁게 함께 아침을 준비하다가, 얼빠진 목소리의 에코의 전화를 받는 일도 없다.

바로 며칠 전 통화하며 약을 먹어대서 속까지 안 좋아 더 우울하다 시기에, "아이고 그거 진짜 괴로운데, 그 병이 바로 제가 전문이라 잘 알지요" 했더니, "그래 니 쫌 아네!" 하셔서 함께 하하 웃었던 양반이니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아 무릎에 힘이 빠져 그대로 꿇어앉아 부엌에서 간신히 기어 나오지 않아도 되고, 또 그 소리에 놀라 달려 나왔다가 내 말을 듣고 아빠걱정부터 한 착한 아이와 우황청심환 한 개를 나누어 꾹 꼭 씹어 먹고야 정신을 수습하고 허둥지둥 최대한 빠른 한국행 티켓을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


다른 때 같았으면 시간을 맞추어 누군가가 마중을 나왔겠지만 워낙 갑작스러운 길이라,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이 전화로 받아 적은 약도를 손에 들고, 트렁크를 든 채로 두리번두리번 공항버스와 일반버스를 갈아타가며, 처음 가보는 신도시 어딘가 장례식장으로, 오는 내내 기내에서는 외려 기가 막혀 못 잔 잠으로 거짓말처럼 꾸벅꾸벅 졸며 졸며 찾아 간 장례식장의 기억도,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맞이한 죽음이라 장례식장에서 알선한 상조회에서 하라는 대로 어머니 유골을 거치하게 된 어느 막다른 길 끝, 깊은 산속 절에 붙은 납골당을 오가며 정신없이 치른 장례식의 기억도 이 우주에서는 없다.


정신없는 중에 어머니 일이니 어서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을 자꾸 하던 기억도.


그저, 그 며칠 전의 통화 중에도, 워낙 자꾸 시댁에서 큰돈을 해다가 날려먹는 시동생에게 또 돈을 해 준걸 다 아는데도 또 거짓말을 하시는 어머니에게 언제나처럼 그냥 속아드리며 혀를 찼을 뿐이다.


어차피 당신이나 나나 이러다 말 살이인데 얼굴 붉히지 말자, 하면서.





현우주에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10여 년 전 한국에 갔다가 다시 떠나오기 전 시댁 앞이다.

꽃단장 다 하고 공항으로 배웅 나온다고 준비하셨는데 우리를 태워주기로 한 차에 작은집 아이들이 타고 와서 짐 싫고 자리가 모자라 못 타시게 되어버려서 허탈한 표정을 짓고 계시는 어머니가 안 쓰러워 폭 안았는데, 그다지 크지 않은 몸집의 나에게도 어머니는 한참 작은 사람처럼 안기던 기억이다.

살가운 성격이 아니시던 어머니와의 포옹은 사실 그게 처음이었고, 결국 그게 마지막이 되었다. 워낙 목욕탕 가는 걸 좋아하시는데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낯선(!) 사람과 옷 벗고 만나는 게 싫어서 같이 목욕탕을 가자고 하실 때마다 늘 이런저런 핑계를 댔더니 종내는 "쟈는 목욕탕 가면 죽는 줄 안다"하고 웃어버리시던 어머니.

더 자주 안아드리고, 까짓 목욕탕에서 같이 벌거벗고 등도 밀어드릴 것을. 그게 뭐라고.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는다며 장례를 치르는 내내 말간 얼굴로 어릿거렸고, 집에 돌아와서도 얼핏 보기에는 평상시처럼 무난히 할 일을 하면서 지내는가 싶었던 에코였다. 그런데 그러던 하루, 어딘가 자꾸 정신을 딴 데 두고 있어서, 너 오늘 왜 그러냐고 무심히 물었는데 "너 엄마 죽어봤냐"며 머리가 허연 중년남자가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었다.

에코는 이미 지난 몇 년에 걸쳐 에코를 키운 사람 둘, 할머니와 막내고모를 임종도 못하고 잃었고, 이제 어머니마저 잃은 것이니 '엄마 잃은 마음'은 모를지 몰라도 당시 연애기간을 포함해 20년을 넘게 함께 한 내가 그 속을 모를 리가 없었고, 그도 너무 슬퍼서 억장 무너지는 소리 하는 거지 물론 내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90이 넘어 돌아가신 할머니도 암을 앓고 있던 고모도 더 자주 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또 우리 사정이 한참 좋지 않아서 한국에 자주 가지 못하는 마음은 나도 무거웠으니까. 나를 참 예뻐해 주신 분들이었기에.

엄마를 '돌아가셨다'라고 하지 않고 죽었다, 고 한 그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그, 가까이만 가도 베어버릴 것 같은 날것의 현실감을.

그렇게 울다가 그는 사실은 이미 수업 직전에 갑자기 눈물이 나서 오피스에서 울고 간 적이 있다는 말도 그제야 했고, 그렇게 코 빨갛고 눈 부어서 수업을 어떡했느냐고 그랬더니, 어차피 동양인이라 학생들은 자기 눈이 원래 그런 줄 알았을 거라고 해서 같이 헛웃음을 웃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오늘도 아직 살아계신 우주는 모든 가능한 우주 중 묘하게도 몇 안 된다.

사람이 회한이 있으면 대개,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조금만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바람직하게 바꾸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지만, 이 경우 내가 잔인하게도 기어이 그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우리는 종종 어떤 타당한 논리적인 이유 때문에 가 아니라 그저 '내가 나기 때문에'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머니가 다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해 한국에 가지 않은 이유는, 당장 생명에 위협이 잇는 병이 아니기도 했지만 다음 해 나의 이버지 팔순잔치가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본가 아버지는 평생 자식과도 '안 주고 안 받는' 깔끔하고 매우 합리적이었던 양반인데, 그런데 팔순과 엄마 아빠의 50주년 결혼기념을 앞둔 몇 년 전부터 유난히 크게 축하를 하고 싶어 하셨고, 어차피 곧 갈 것이란 생각에 별로 조바심 내지 않았다.

한번 한국에 가려면 비행기표는 물론 아무리 한국에 이제는 없는 것이 없다고 해도 완전히 빈 손으로는 갈 수 없고, 이왕 갔는데 빈손으로 올 수도 없고, 보험도 없이 각종 검사와 치과치료에 안경에, 이런저런 밀린 만남 등 한 달 지내는데 7-8백만 원은 기본으로 들기 때문에 아니할 말로 죽을병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간다고 달라질 것도 크게 없고, 일단 아버님과 작은 집도 있으니, 가면, 가서, 두 배 세배로 잘해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나 임신 7개월에 시할머니 교통사고 나셨을 때 그랬듯, 받아내야 하는 게 있으면 받아내고, 수발들 것이 있으면 수발들고, 음식도 해드리고, 청소도 하고, 떨어져 산만큼 다 갚아드릴 자신이 있었다. 나는 미국 오기 전 7년 동안 제법 괜찮은 며느리역할을 할 줄도 알고, 처음 미국 와서 가난한 학생시절의 어려운 시간들도 어른들에게 손 절대 안 벌리고 잘 이겨낸 믿음직한 맏며느리로 인정받은 사람이었기도 하고.

그러니까, 많은 우주의 나는, 에코는, 우리는, 우리는 우리라서, 결국에는 돌아가셔서 그예 그렇게 그 해에 한국에 갔어야 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70 노인인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뿐이긴 하지만(죽음에는 순서가 없고, 떨어져 나와 사는 우리에게는 늘 부모님의 결국은 '갑작스럽기 쉬울' 죽음에 대한 준비되지 않는 두려움이 있다), 이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우주에서는 또 다른 것이 있다.

우선, 이 우주를 따라가면 2년 후 에코의 안식년을 한국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은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생기는 데로 죽어라고 한국에나 가느라 이날까지 여행이라고는 미국 내와 캐나다 외에는 가본 적이 없는 우리가 드디어 유급으로 일 년을 쉴 수 있는 에코의 안식년을 맞아, 부모님이 서운해 하시든 말든 한국은 놔두고 가고 싶은 데를 마음껏 놀러 다니며 살았을 우주가 있고, 대신 한국에서 가까워서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중국이나 일본은 결국 두고두고 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현 우주에서처럼 안식년동안 한국의 방방곡곡을 버스를 타고 신나게 누벼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은퇴 후 고국으로 돌아가더라도 그예 힘이 달려 마음만 백두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 우주에서는 어머니 장례식 때 그렇게 다녀온 후로도 아버지가 서운해하실까 우리는 다음 해에도 무리를 해서 예정대로 다시 갔었고, 다시 2년 후 안식년은 한국의 대학으로 결정해서 부모님 집에서 머무르며 같이 여행도 하고, 지지고 볶으며 10개월을 같이 보냈다. 사실 내가 미국에 와서 20년이 넘게 떨어져 산다고는 하나 따지고 보면 분가 후 같이 한 지붕 밑에서 가장 오래 산 자식이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은 우주에서 갈라져 나간 우주 중에는, 늘 그렇듯이 마음에 없이 늘 '그냥 넘어가자'라고 해 놓고 나중에 엄마를 무시한다며 서운해하시는 엄마의 묘한 취미(?)에 지쳐서 몇 년 후 엄마의 팔순 때 알았다고 정말 안 가버린 우주도 (설마)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심술궂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우주는 역시 없거나 매우 드물 것이다.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우리 부모에게, 내버려 두어도 혼자 잘하고, 기분 나는 데로 대해도 혼자 잘 추스르고, 일 시킬 것이 있을 때만 '착하게' 말 잘 듣는 사람이니까. 어려서부터 다들 이런저런 핑계로 도망 나가고 난 집에 혼자 남아 팔이 떨어져라고 고추장을 젓고, 철철이 엄마를 도와 커다란 화분을 이층 아래층 마당으로 옮기고, 그만 마침 똑 떨어진 재료를 채우러 헐레벌떡 시장으로 심부름을 뛰어갔다 오면서도, 어쩌다가 한번 '또 나냐'는 어린 볼멘소리 한마디에 일은 일대로 다 해놓고도 핀잔나 듣는 만만한 아이니까.

이런 사람이 하는 짓은 '어디'에서도, 그리고 '언제'에서도 대충 비슷할 것이다.


살인자는 살인을 해서 살인자가 되는 게 아니라 살인자기 때문에 살인을 하는 것이란 말이 있다.

저지른 일에 내로남불이라도 하지 일부러 '악'하고자 하는 사람도, 결과를 확실히 알고 잘못하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전재산을 날리기 전 까지는 도박꾼이 아니라 투자자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내재한 인성과 순간순간의 선택이 결정한 삶을 살아가고, 불행히도 그 결과는 시간이 흐른 후에나 알게 되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고, 수순에 따른 일련의 행동을 따라 필연적으로 보이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 대개의 우주에서의 나는 그렇게 '착한' 자식이어서, 에코의 어머니에게는 임종도 못하고 마지막에 병시중도 못 들어드린 '나쁜' 자식이 되어버릴 것이다.

나는 멀리 사는 자식이라서 결국 그 순간은 비슷하게 올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것은 운명론도 아니고, 타고난 인성론으로 잘못의 필연성을 변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세상에는 내가 어떻게 사는 가와, 내가 어떤 사람 인가 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걸 아는 것도 중요하다.


얼핏 개개인의 삶에 그렇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은 일로 세계와 인류의 역사가 바뀌기도 하니까.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갈라져 나온 다음 우주처럼.


그림 :First steps -Vincent Van Go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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