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허기를 채우는 온기

기다림은 선택일까

by 아타마리에

2023년 8월 (by 수영)


“나도,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돼?”

주말에 가족을 만나러 간다는 재일의 말에, 나도 모르게 같이 가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막상 정적이 흐르자 어색함이 밀려왔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친구라고 하면 괜찮을까, 아니면 동료라고 해야 할까.’

약속을 해버렸지만, 마음 한편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재일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날, 마트에서 과일 바구니를 샀다. 버스 정류장에는 그가 먼저 나와 서 있었다.

“수영아, 뭘 이렇게 들고 왔어?”

“그냥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이리 줘. 무거운데, 혼자 어떻게 들고 온 거야.”

우리는 나란히 하남행 버스에 올랐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었지만, 그가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마다 알 수 없는 긴장이 감돌았다.


재일의 부모님 가게는 낡은 상가 한쪽에 있었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색색의 단풍이 상가 길 앞에 곱게 피었다. 재일의 추억이 가득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모두가 나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이내 어색함은 사라졌다. 재일의 부모님은 따뜻하신 분들이었다. 내가 불편해할까 봐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차를 마시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곧이어 식사를 준비하신다고 분주하게 움직이시는 부모님을 보며 나도 도울 마음에 주방 앞을 서성거렸다. 어머님은 괜찮다며 한사코 손을 저으셨다. 결국 나는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다시 자리에 앉아야 했다.


“앉아요. 재일이 친구는 원래 우리 집 손님이에요.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앉아 있어요, 정말.”

“맞아요, 누나. 앉아요. 여기 일할 사람 엄청 많거든요.”

재일의 동생 재현은 붙임성이 남달랐다.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모습에 낯선 자리의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다.

‘어쩜 형제가 이렇게 다를까. 재일은 처음엔 한마디도 없었는데…’

책방에서 처음 마주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와 조용히 서 있던 그의 모습,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이던 그날. 지금은 그 사람의 집 식탁에 앉아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재일은 주방으로 들어가고, 테이블엔 나와 재현만 남았다.

“누나, 저희 집은 주방 일은 원래 남자들이 잘해요. 하루이틀이 아니라, 늘 그래왔죠.”

재현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지난주에 전역했다고 했죠?”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편하게 말하세요. 저 스물두 살이에요.”

“그래, 그럴게. 복학은 언제 할 거야?”

“내년에요. 근데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형처럼 공부에 재미를 느끼는 것도 아니고… 올해는 여행 좀 다니면서 앞으로 뭘 할지 생각해 보려고요.”

“여행? 어디로?”

“형이랑 미국이요. 전역하면 꼭 그랜드캐니언에 가자고 약속했거든요. 이제 슬슬 표도 알아봐야죠.”

“그랜드캐니언이라니… 정말 좋겠다. 나도 아직 못 가봤는데.”

학부와 대학원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지만, 정작 여행은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자유롭게 미래를 이야기하는 재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부러움이 스며들었다.


“누나, 근데요… 저 하나 물어봐도 돼요?”

“응?”

“형이랑, 무슨 사이예요?” 재현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 그냥 친구야.”

“에이, 친구라뇨.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누나.”

장난기 어린 눈빛이 마주쳤다.

“진짜야. 지금은 친구야.”

“지금은요?”

“응.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

나도 장난스럽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렇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웃음이 흘러나왔다. 재현과 나는 비밀을 공유한 듯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사이, 재일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음식을 내오셨다. 감사한 마음에 배가 불러도 젓가락을 멈출 수 없었다. 모든 음식이 꿀맛이었다.


식사 도중, 어머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외국에서 나와 있으니 엄마 밥이 그리울 텐데, 언제든 와서 먹어요.”


왜였을까. 엄마 밥이 그립냐는 질문보다 언제든 와서 먹으라는 어머니의 그 말이 훨씬 더 따뜻하게 다가왔던 건.

“사실… 제가 엄마 밥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어릴 때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요.”

그 고백이 입 밖으로 흘러나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도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모두의 시선이 따뜻했고, 곁에는 재일이 있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엄마는 더 이상 아픔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이게 엄마 밥이다 생각하고 와요.”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재일의 어머니가 싸주신 반찬들을 열었다. 두 개의 쇼핑백에는 각종 나물과 밑반찬, 갖가지 김치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또 따로 챙겨 주신 보냉백 안에는 한 끼 분으로 소분된 고기들이 들어 있었다.

하나씩 열어보다가 일어나 주방 찬장에서 그릇을 꺼냈다. 주신 반찬들을 그릇에 조금씩 덜어내고 냉장고에 넣었다. 냉동해 둔 밥을 데워 테이블에 앉아, 반찬들을 조금씩 입에 넣었다.


‘엄마 밥.’

난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 밥’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려준다는 것, 그것은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 빈자리를 온기로 메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재일이 왜 늘 가슴속에 따뜻한 공기를 품고 있는지를.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려던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응, 재일아. 잘 들어갔어? 나 밥 먹고 치우고 있었어.”

“아까 엄청 먹은 것 같던데? 너 그렇게 잘 먹는 줄 오늘 처음 알았네.”

“아니야. 너무 맛있어서 그래.”

“다행이다. 너 입에 맞을지 몰라서 나도 은근히 신경 쓰였거든.”

“아니야, 너무 좋아. 꼭 감사하다고 전해줘.”

“그래. 근데, 수영아… 나 너한테 상의할 게 있어.”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뭔데…?”

“어제 교수님께 메일이 왔어. 포닥 제안을 받았어.”

“정말? 어디서?”

“MIT.”

미국이라니. 재일의 박사 과정이 끝나간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왜 이런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을까. 그의 열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그 순간 먼저 축하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정말? 축하해, 재일아.”


“나… 가야 할까?”

아차, 미국으로 가야 하는구나.

순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하얗게 변한 머릿속이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가지 말라고, 아니 가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야지. 당연히.”

그 말이 입 안에서 맴돌며 잠시 쓰라렸다. 그가 내 곁에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그래서일까. 더 붙잡고 싶어지는 마음을 애써 다독여야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오래전 장면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우진이 토론토에 남겠다고 했을 때, 끝까지 미국으로 가겠다고 고집하던 내 모습.

피식 웃음이 났다. 우진에 대한 마음이 컸던 만큼, 내가 가고자 했던 그 길도 그만큼 소중했다. 그래서 재일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무작정 응원해 주고 싶었다. 나 때문에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무엇보다, 그가 기다려 준 만큼 이번엔 내가 기다릴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틀고, 수세미로 그릇을 닦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사랑은 어쩌면, 한쪽이 희생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길을 지켜 주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2023년 10월 (by 재일)


컴퓨터 앞에 앉아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수영의 세미나 강연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미 모두의 스타였다. 과학계를 이끄는 최연소 교수. 나도 그녀만큼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학계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야 수영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하지만 최소 3년은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그 시간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일 년에 한 번씩만 서로 방문할 수 있다면…’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 속에서 나는 미로의 끝에 서 있었다.


‘돌아왔을 때, 그녀와 멀어지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마지막까지 결정은 어려웠다. 아직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우리의 관계에 또 다른 변수를 더해야 했으니.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수영은, 내가 아는 그녀는, 진심으로 내 선택을 응원해 줄 사람이라는 것.


나는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나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2주간의 미국 여행으로 자리를 비울 생각에, 늦게까지 할 일을 마치고 연구실에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2주간의 여행 동안 만나지 못할 수영에게 들르기로 했다. 그녀의 아파트 단지 앞에서 버스에서 내려걸었다. 집 앞 놀이터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열었다.


“수영아, 나 왔는데. 내려올래?”

잠시 후, 회색 후드티에 검정 요가 팬츠를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수영이 나타났다. 나를 보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후…’

요즘 들어 그녀 앞에 서면 괜히 말이 막히곤 했다. 손을 둘 데를 몰라 허공을 더듬는 나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재일아, 왔어?”

우리는 놀이터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어, 뭐 하고 있었어?”

“책 읽고 있었지. 너 기다리면서.”

“무슨 책?”

“네가 선물로 준 책. 한여름밤의 꿈.”

별것 아닌 대화에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달아오른 표정을 감추었다.


“재일아, 준비는 다 했어?”

“대충 된 것 같아.”

“트레킹화랑 점퍼는?”

“챙겼지.”

“선크림은?”

“아… 안 챙겼다. 아마 재현이가 챙겼을 거야.”


“내가 챙겼어.”

“응?”

“그럴 줄 알고, 내가 사 왔어. 너 이런 거 안 바르는 거 알고 있었거든.”

선크림을 내미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요즘 들어 수영과 시선이 닿을 때마다, 나는 먼저 고개를 돌리곤 했다. 떨리는 마음이 눈빛에 드러날까봐.

“… 고마워.”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러면 LA로 먼저 가는 거지? 좋겠다. 나도 거긴 못 가봤어. 사실, 가본 데가 없어서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라니까.”


“다음에, 같이 가자.”

무슨 용기였을까. 반쯤 진심인 말을 내뱉고는, 혼자 농담처럼 웃어넘겼다.

“그래, 너 MIT 가면 우리 LA에서 만나자!”

수영의 대답도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끔 이런 그녀가 야속하기도 했다. 이런 스쳐가는 이야기에도 마음 졸이는 건 나뿐이었다.


“너 가면, 2주 동안 연락은 할 수 있지?”

“응, 유심 사면 메시지도 하고 통화도 할 수 있어.”

“조심히 다녀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두근거림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뒤 집까지 달려갔다.

2주일조차 버틸 자신이 없는데, 앞으로의 시간은 어떻게 견뎌야 할까.



LA행 비행기가 이륙했다. 재현은 공항부터 액션캠을 들고 내내 비디오를 찍었다. 간혹 성가시긴 했지만, 재현은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 덕에 여행 내내 심심하거나 우울할 일이 없었다.

“너는 비디오로 뭐 찍는 거야?”

“나? 브이로그. 유튜브에 올릴 거야.”

“그래?”

항상 트렌드에 민감하고 뭐든 흥미를 가질 나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형, 책 읽으려고?”

“응. 너도 읽을래?”

“나는 고전 싫어. 어렵고 재미없어. 캐릭터도 뻔하고.”

“진부한 게 아니라, 네가 안 읽어서 그래.”

“그래? 근데 수영 누나랑도 독서 모임에서 만났다며?”

“응.”

“어땠는데? 얘기 좀 해봐.”

“별거 없어. 그냥 현승이 따라간 거였어.”

“ 뭐야. 영화도 아니고, 우연히 따라간 모임에서 이상형을 만났다? 완전 드라마네.”

“아니라니까.”

“아니기는. 서른 다 돼서 집에 그냥 친구를 데려온다? 말이 돼?”

“또 까분다.”

“형 얼굴이 이미 다 말해주는데?”

나는 책장을 넘기며 못 들은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부정할 수 없었다. 재현의 말이, 전혀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수영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우리 사이, 그냥 친구라 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긴 비행 끝에 공항에서 렌터카를 픽업해 숙소로 향했다.

“하… 살 것 같다. 좀 쉬자. 나 비행기에서 잠을 못 잤어.”

“형,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와서! 나가자, 할리우드 가야지.”

“조금만 쉬고 내일 가면 안 돼?”

“형, 피곤한 거 알지만 나가자. 수영 누나한테 보낼 사진도 찍어야지.”

재현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재현은 매일 영상을 찍었고, 나는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 수영에게 전송했다.

“수영아, 여기 유니버설 스튜디오야.”

“재현이랑 타코 먹으러 왔어.”

“여기가 할리우드래.”

“지금 라스베이거스로 출발해.”

그녀의 답장은 늘 1분을 기다리지 않았다. 화면에 뜨는 짧은 문장들은 마치 그녀의 목소리처럼 생생했다. 그리움은 하루하루 겹겹이 쌓여, 내 안의 빈 공간을 천천히 잠식해 갔다.



그랜드캐니언에 가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렌터카를 몰고 사막을 따라 달렸다. 광활한 대지 위로 사파이어빛 하늘이 끝없이 펼쳐졌고, 그 길의 끝에 우리가 향하는 협곡이 있었다.


한참을 달려 마주한 그랜드캐니언은 숨이 멎을 만큼 웅장했다. 새파란 하늘 아래 굽이치는 에메랄드빛 강, 세월에 깎여 내려간 거대한 절벽과 협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장관 앞에서 온몸의 신경이 살아 움직였다.


국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동 중에도, 전망대에 서서도 재현의 카메라는 멈추지 않았다.

“너, 영상 찍으려고 여행 온 거야?”

“아냐, 형이랑 왔으니까 찍는 거지. 여기 좀 서봐, 내가 찍어줄게.”

“아니야, 됐어.”

“형, 진짜 한 번만 서봐.”

나는 마지못해 자리에 섰다.

“저쪽을 바라봐. 그렇지! 아, 좋아. 딱이야.”


그 뒤로도 재현은 액션캠을 이리저리 돌리며 스스로를 기록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듯 자연스러운 모습은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형, 처음이 어렵지. 막상 시작하면 다 별거 아니야.”

그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새벽 일찍 일어나 일출을 보러 나왔다. 그랜드캐니언은 어둠 속에서도 그 웅장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빛이 드러났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협곡 위에 모두의 아침이 드리워졌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자연이 빚어낸 장관에 넋을 잃었다.


“형, 여기 와봐. 한 장면만 찍자.”

“또? 아침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야.”

“이 위치에서 협곡을 바라보면서 양팔을 벌려봐. 그리고… ‘수영아, 사랑해!’ 한 번만 외치는 거야.”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하지 마.”

“형 진짜. 이 장면 꼭 찍어야 돼. 나중에 프러포즈할 때 쓰면 딱일 거야. 그때 되면 형, 진짜 나한테 고마워할걸?”

“하… 그래도 이런 건 좀…”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동생 앞에서, 아니, 생전 해본 적 없는 말을 꺼내는 건 쉽지 않았다.


“형. 이런 기회, 다시없어. 인생에 한 번일지도 몰라.”

그의 긴 설득 끝에, 나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그랜드캐니언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형, 간다. 지금이야!”

나는 눈을 감고, 떠오르는 태양과 광활한 협곡의 숨결을 온몸으로 들이마셨다. 가슴속 깊이 겹겹이 쌓여 있던 그녀를 향한 감정을 끌어올렸다.


“수영아, 사랑해!!!!!!!”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협곡을 타고 퍼져나갔다. 숨이 가빠지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헉… 헉…”

“형, 괜찮아?”

“헉… 헉… 어. 속이 시원해졌어.”



재현과의 여행도 벌써 8일째였다. 우리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하루 종일 걷다 돌아왔다. 전화 신호가 잡히지 않아 메시지를 보낼 수도, 받을 수도 없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수영과 통화를 마치고, 요리 중인 재현을 도우러 주방으로 나왔다.

“형, 그렇게 매일 통화하면서 아직도 사귀는 게 아니야?”

“아니라고 했잖아.” 나는 짧게 잘라 말했다.

“그럼 그냥 고백해. 돌아가서… 보는 내가 다 답답하다.”

“수영인… 내가 좋아하는 거 이미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 사귀자고는 말해 본 적 있어?”

“아직은…”

재현은 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형, 진심이면 말해.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아.”


생각해 보니 수영이 퇴원한 지도 어느덧 8달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 곁에서 일어난 모든 순간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기다림…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말로 뱉었을 때보다 훨씬 무거웠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이미 포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돌아가면… 사귀자고 말해야 할까.’

머릿속에서 무겁게 맴돌던 질문이 가라앉기도 전에, 불현듯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수영이었다.


“보고 싶어”

그 순간, 심장이 온몸을 울리는 공명처럼 진동했다. 끝없이 눌러 담아 두었던 감정이 더는 머물지 못하고 터져 나오기 직전까지 다다라 있었다.

나는 알았다.

어쩌면 더는 기다릴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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