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기다림의 끝에서

다시, 용기를 내어

by 아타마리에

2023년 10월 (by 수영)



재일의 부모님을 방문한 이후 그는 매일 바빴다. 마지막 논문 발표에, 미국 여행으로 2주나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 미리 해둘 일들이 쌓여만 가는 것 같았다. 주말에도 연구실에 나가는 그의 일정 탓에, 지난 몇 주간 주말 약속은 번번이 미뤄졌다. 가끔 재일이 집에 가는 길에 우리 집 앞에 들러 잠깐 얼굴을 보는 게 전부였다.


그날도 그랬다.

2주 동안 미국을 여행하는 재일에게 뭐라도 챙겨주고 싶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검색창에 ‘미국 여행 준비’를 쳤다.

“트레킹화, 바람막이… 선크림?”

‘선크림은 아마 준비 못 했을 것 같아…’

지난겨울 병실에서 함께 지낼 때, 남성용 로션 하나만 쓰던 재일의 습관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화장품 숍에 들러 그에게 줄 선크림을 골랐다.


재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재일아 내일 출발이지? 이따 잠깐 볼 수 있어? 학교 앞 카페에서?”

“수영아, 나 정리할 게 많아서… 내가 끝나고 너희 집 앞으로 갈게. 쉬고 있어.”

그를 만날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요즘 들어 그의 소식을 더 자주, 더 간절히 기다리곤 했다. 하루 종일 답이 없을 때면, 그 작은 공백조차 마음을 흔들 만큼 크게 다가왔다.


시계는 어느새 밤 아홉 시를 넘어 있었다. 재일은 아직 연구실에 있을까. 읽던 책을 덮고 몇 번이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머리끈을 감았다가, 이내 다시 풀어냈다.


책상 위에는 <한여름밤의 꿈>이 놓여 있었다. 생일 다음 날, 그가 건네주던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몇 번이고 반복해 읽은 책. 병실의 그 밤, 미세한 진동으로 가득 차 있던 둘만의 공간, 귓가를 스치던 그의 목소리가 문장마다 겹쳐 흘러왔다.


띠리리.

휴대폰 화면에 그의 이름이 떴다.

“수영아, 내려올래?”

전화를 끊고 급히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손에는 선크림이 쥐어져 있었다. 그대로 집을 나서자, 멀리서 재일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천천히 와, 수영아.”

환히 웃는 그의 얼굴에, 가슴속 답답함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재일아, 준비는 다 했어?”

손에 쥔 선크림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대충… 된 것 같아.”

“트레킹화랑 점퍼는 챙겼지?”

“응, 챙겼어.”

“그럼… 선크림은?”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멈칫했다.

“아, 깜빡했네. 아마 재현이가 챙겼을 거야.”

“내가 챙겼어.”

대답과 동시에 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응?”

“그럴 줄 알고 내가 사 왔어. 너 이런 거 안 바르는 거 알거든.”

선크림을 내미는 내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흔들리는 내가 고스란히 비쳐 있었다.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LA로 먼저 가는 거지? 좋겠다. 나도 거긴 못 가봤어. 사실, 어디든 제대로 가본 데가 없어서…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말하기도 좀 그래.”

“다음에, 같이 가자.”

짧은 한마디가 머릿속을 멈추게 했다.

“그래, 너 MIT 가면 우리 LA에서 만나자!”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속엔 간절한 진심이 들어 있었다.


그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도 ‘같이 가자’는 말은 귓가에 맴돌았다.

‘언제쯤, 나는 그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그가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매일 같은 시간 같은 해가 떠올랐다. 나는 수시로 휴대폰을 확인하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재일은 방문하는 곳마다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미국의 광활한 풍경과, 어딘지 익숙한 도시의 색들. 그의 사진들을 보며 나도 그와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같은 장소를 함께 걷고 있을 미래를 조심스레 그려보았다.

몸은 여기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절반쯤 미국에 가 있었다.


“교수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어, 응? 아니야.”

학생이 부르는 소리에 흩어지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다.

“아까 들어오셔서는 계속 아무 말씀도 없으시길래…”

“아, 아니야. 실험은 끝났어?”

“네. 아까…”

이미 내 하루는 그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험실에서 나와 메시지를 보냈다.

“재일아, 숙소 들어가면 통화할 수 있어?”


그가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갈 즈음이 내 점심시간과 어렴풋이 맞았다.

“수영아, 점심은 먹었어?”

“응, 대충 먹고 통화하려고 밖에 나와서 걷는 중이야.”

“학생들 과제 채점은 다 했어?”

“응. 어…”

“옷은 따뜻하게 입었고?”

“어, 오늘은 날이 따뜻해. 거기는 어때?”

“오늘 아침에 그랜드캐니언 일출 봤어… 진짜,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TV로 보던 거랑은 너무 다르더라. 가슴이 막 터질 것 같고…”

“누나, 저희 영상도 찍었거든요!”

갑자기 재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야! 쉿! … 아니야, 수영아. 재현이가 딴소리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영아…” 그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멈췄다.

“응?”

“그냥…”

“재일아, 나 이제 들어가 봐야 해…”

“그래. 남은 하루 잘 보내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메시지 할게.”

“응… 잘 자.”

수화기 너머의 따뜻한 목소리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온기에 나는 점점 취해 갔다.



주말이 되자 아침부터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오늘은 어디에 갔을까.’

점심때쯤, 전화가 왔다.

“수영아, 주말인데 안 나가고 집에 있었어?”

“응, 할 일이 많아서…”

“오늘따라 신호가 잘 안 터지더라. 나도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어. 저녁은 먹었어?”

“아니, 지금 재현이가 하고 있어. 나도 나가서 도와줘야 해.”

“그래, 그럼 얼른 가서 도와줘.”

“응, 이따 또 연락할게.”


짧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침대에 누우니 열어 둔 창으로 서늘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머릿속은 온통 재일뿐이었다. 옆으로 돌아눕자 손끝이 그의 체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은 천천히 온몸으로 번져왔다. 가슴이 눌린 듯 아파왔다. 나는 더는 이 감정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휴대폰을 열고 메시지를 적었다.

“보고 싶어…”


그가 돌아올 날이 이제 사흘 남았다. 지난 열흘 동안 그리움은 불길처럼 번져 갔다. 그리고 오래도록 마음 깊은 곳에서 잠자듯 머물던 그것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2023년 10월 (by 재일)


나는 수영과 영상통화 중이었다.

“내일이지?”

“응, 내일 밤 비행기 타.”

2주간의 여행이 끝나간다. 드디어 그녀를 본다는 생각에 입가의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그때, 바깥에서 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어, 곧 나갈게!”

기다리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재현이 내 휴대폰 화면을 힐끗 보더니 물었다.

“나도 인사해도 돼?”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나, 저 재현이에요.”

수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 재현아. 어디 가는 거야?”

“네, 저희 마지막 날이라 맥주 한잔 하러요. 형이 매일 누나랑 통화만 해서 저 진짜 심심했어요.”

익살스러운 말투에 수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정말? 미안해… 지금 나가는 거야? 얼른 다녀와.”

“네, 오늘만 형 좀 빌릴게요. 한국에서 뵐게요, 누나.”

재현은 화면 속에 대고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재일아, 너 빨리 가봐.”

수영이 다정하게 말했다.

“응. 곧 보자. 공항에서 메시지 할게. 아마 일찍이라 넌 자고 있겠지만.”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재일아, 잠깐만. 비행기 도착 시간, 다시 한번만 말해줘.”

“응, 오전 여섯 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재현이랑 좋은 시간 보내.”


재현과 나는 근처 펍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소박한 동네 술집이었다.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저녁을 즐기고 있었고, 모서리 자리에는 혼자 맥주잔을 기울이는 이들이 앉아 있었다. 잔잔한 음악과 낮은 웅성거림 속에 우리도 자연스럽게 섞여 자리를 잡았다.


재현이 바에서 맥주 두 잔을 받아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자, 형. 한잔 하자.”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넘친 맥주 거품이 가장자리로 흘러내렸다.

“다 컸네, 너도. 아직 어린애라고만 생각했는데…”

내 말에 재현은 고개를 들어 웃으며 대꾸했다.

“형, 나도 많이 컸지. 이제 성인이야.”

“내년에 복학하는 거야? 2학년으로?”

“모르겠어, 형. 나 학교 때려치울까 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어? 그럼 뭐 하려고?”

“유튜버.”

“뭐?”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튀어나왔다.

“여행 유튜버. 원래 영상 촬영 좋아하잖아. 여행하면서 브이로그 찍고, 돈도 벌고. 나 원래 공부 체질 아니야… 형 따라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대학 간 거지. 아, 엄마 아빠는 아직 몰라. 형한테 먼저 말하는 거야.”


재현의 눈빛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원하는 것을 알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지금 세대가 가진 솔직함이었다. 늘 망설이며 발을 내딛던 나와 달리, 그는 삶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 자유로움이, 나에게는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그래, 뭐든 해봐. 젊을 때 해보는 거지.”

“진짜? 형이 응원해 줄 줄은 몰랐네. 고마워. 아, 그리고 이번 여행 영상 멋지게 편집해서 보내줄게. 나중에 꼭 써먹어.”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형… 한국 가면 꼭 수영 누나한테 고백해.”

“그게… 쉽지 않아.”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나, 내년에 미국 가기로 했어. MIT에서 포닥 제안을 받았거든.”

“뭐? MIT? 진짜 대박! 엄마 아빠도 알아? 우리 형, 진짜 대단하다니까?!”

재현은 흥분한 목소리로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래서… 수영이한테, 사귀자는 말을 못 하겠어.”

재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냥 사귀어. 어른들이잖아. 서로 왔다 갔다 하면 되지. 군대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미국도 하루면 가.”

맞는 말이었다. 정작 내 마음은 여전히 두려움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그럴까?”

재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영 누나는 거절 안 해.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알아?”

“보면 알지. 형 볼 때 누나 눈빛을 보면… 그냥 이미 게임이 끝난 거야…”


웃음이 터지려다 멈췄다. 재현의 농담 같은 진담이 내 가슴을 뜨겁게 파고들었다.

다시, 용기를 내야 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 면세점을 돌았다. 수영에게 줄 선물을 고를 참이었다. 화장품과 향수 코너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수영 누나 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뭘 사야 하지…”


재현이 장난스럽게 하나를 들어 보였다. 꽃 모양 유리병 속에서 은은한 향이 번졌다. 나는 병을 가까이 대고 향을 맡았다. 순간, 그녀가 내 옆에 앉을 때마다 감돌던 향기가 겹쳐왔다. 그때의 웃음, 목소리와 온기까지. 향기 하나로 수영은 되살아났다.


계산을 마치고 쇼핑백을 들었을 때, 쑥스러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고른 첫 선물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마음속에 그린 채 비행기에 올랐다.

‘잠시 눈을 붙이고 나면, 곧 수영을 만날 수 있겠지.’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밤을 꼬박 새운 탓에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로 들어서자, 재현이 놀란 듯 외쳤다.


“어? 형, 저기! 수영 누나 아니야?”


고개를 들자, 멀리서 그녀의 시선이 나를 붙잡았다.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그녀 역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순간, 수영은 두 팔을 올려 내 목을 감싸 안았다. 차가운 공항 공기 속에서 그녀의 체온이 전해졌다.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이제, 시작하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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