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사랑은… 다가올 내일에 대한 욕심

너와 함께, 천천히

by 아타마리에

2023년 10월 (by 수영)


“고객님, 어떤 스타일 원하세요?”

미용실 거울 속의 내가 낯설었다. 작년 봄이 마지막이었나.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가 무겁기도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늘 미뤄 두었던 일. 정작 의자에 앉고 나니 원하는 스타일을 정해 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좀 다듬고, 음…”

“그럼 제가 얼굴형에 맞게 볼륨 웨이브에 앞머리는 살짝만, 톤은 부드럽게 염색 어떠세요? 분위기 훨씬 살아나실 거예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오후에는 재일과의 첫 데이트가 있었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펌 롯드가 머리카락을 하나둘 휘감는 동안, 나는 테이블 위 잡지를 무심히 넘겼다. 화려한 옷차림의 모델들이 웃고 있었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 같았다.

어릴 적부터 외모를 꾸미는 일에 관심도, 소질도 없었는데, 막상 재일을 만나러 가려니 머리도, 옷장 속 옷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모습이 오늘은 영 어색했다.


몇 시간을 앉아 있자 몸이 찌뿌둥해질 즈음, 스타일링이 끝났다. 거울 속에는 부드러운 갈색 웨이브와 살짝 내려온 앞머리의 내가 서 있었다. ‘나쁘지 않네.’


미용사의 관리법 설명을 대충 듣고 미용실을 나섰다. 맞은편 여성복 매장에 들어가 마네킹이 입은 원피스를 그대로 들고 계산했다. 스스로가 낯설어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정말,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손에 익지 않은 구두를 꺼내 신었다. 지하철에 올라서자 며칠 전 공항에서의 장면이 떠올랐다. 혼자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바뀐 머리와 원피스, 낯선 구두까지. 갑작스러운 변화에 재일이 어색해하지는 않을까.


약속 시간, 그는 먼저 와 영화관 앞에 서 있었다. 가까워지자 재일의 시선이 위아래로 내 모습을 훑고, 이내 눈이 마주쳤다. 눈을 크게 뜨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수영아…”

“왜… 이상해?”

“아니, 아니. 진짜… 너무 예뻐. 다른 사람 같아.”

그제야 심장이 가라앉았다. “이제 민망하니까 그만해…” 나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팝콘을 사서 자리로 들어갔다. 스크린이 밝아지는 내내 그는 경직되어 있었다. 팝콘과 음료에만 손이 어색하게 오갔다. 나 역시 정작 영화는 한 장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애 한 번 못 해 본 둘이 만났으니…’

나는 조심스럽게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그의 무릎 가까이에 두른 내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허공에 머물렀다.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고 아주 조금 더 손을 뻗었다. 그때,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덥석, 재일의 손이 내 손을 감쌌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떨리는 미소가 우리의 입가에 흘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맺히게 시작했지만 우리는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극장을 나와 손을 잡은 채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봉골레 하나, 마르게리타 피자, 샐러드… 그리고 레드와인 두 잔 부탁드립니다.”

음식을 기다리며 나는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은 어땠어?”

“매일 너랑 얘기했잖아. 네가 나보다 더 잘 기억할걸. 재현이가 나중엔 서운해했어. 둘이 왔는데 셋이 온 거냐고.”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얼굴이 달아올랐다. 감정에 취한 대화가 이어졌다.

“근데, 너무 크더라. 2주를 다녀도 본 게 없는 기분.”

“그렇지. 커도 너무 크지.”


재일이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다음에… 나 보스턴 가면, 올 거지?”

“응, 갈게.” 준비된 것 같은 대답이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수영아.”

“대신 가서 연구에 매진해서, 성과 빨리 내. 그래야 우리 더 빨리 보지.”

그가 웃었다.

“그건… 할 수 있어.”

시작하자마자 그를 떠나보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성큼 다가왔지만, 우리는 그 무게를 아직은 뒤로 미뤄 두고 싶었다.


우리는 와인잔을 부딪쳤다.

“나 아직도 가슴이 가라앉지 않아.” 재일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왜?”

“네가 공항에 나타난 게… 꿈같아서. 그날 집에 가서도 꿈인지 볼을 꼬집어 보고 싶었어. 내가 살면서 제일 행복했거든.”

맞닿은 유리 사이로 붉은 파도가 출렁였다. 설렘과 익숙함 사이, 이름 붙이길 미루던 감정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 춥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 산책로를 손을 맞잡은 채 서너 바퀴째 돌고 있었다. 들어가라는 말만 몇십 번, 그러나 마음은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현관 앞에 멈춰 서자,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짜… 들어가.” 재일이 웃으며 말했다.

“응. 갈게.”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재일의 손끝이 내 뺨에 닿았다. 내가 떨고 있는 건지, 그의 손이 떨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살짝 벌어진 틈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스며들었다. 엉켜드는 온기가 목 끝까지 차오르자, 길게 내뱉은 숨이 서로의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불에 닿은 듯 뜨거운 입술의 열은 내 몸의 미세한 신경 하나하나에까지 퍼져 나갔다.


놓지 못하고 꽉 잡은 손처럼, 그 밤의 열기도 쉽사리 식지 않았다. 오래 굶주려 있던 마음이 얽히며, 우리는 서로의 체온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스며들었다.

그것이 우리의, 아니, 나의 그리고 재일의 첫 키스였다.



2023년 11월 (by 재일)



“야, 신재일.”

제희가 등을 툭 쳤다.

“요즘 왜 이렇게 칼같이 집에 가? 다들 심사 준비 때문에 미쳐 가는데.”

“나도 바쁘지. 근데 미국 다녀오기 전에 웬만큼 해놔서, 지금은 마무리만 하면 돼.”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주말에 수영을 만나려면 서둘러 정리해야 했다.

이상하게 그녀를 떠올리면, 온갖 압박도 스트레스도 잠시 멀어졌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용암처럼, 거대한 에너지가 나를 밀어 올렸다.


수영을 정식으로 만나기 시작한 지 한 달. 우리는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났다. 평일에는 내가 그녀 쪽으로 갔고, 어떤 날은 수영이 우리 집 앞 카페로 찾아왔다. 스치는 순간까지도 그리움이 가득해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랐다.

“주말에 나도 산에 같이 가면 안 될까?”

그녀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



트레킹화가 없는 수영을 위해 퇴근길에 등산용품 매장을 들렀다. 통유리 너머, 신발을 고르는 그녀의 옆모습이 보였다. 오똑한 콧날, 작은 입술까지, 꿈속에서 그리던 연인의 실루엣이 거기에 있었다.

“수영아, 나 왔어.” 귓가에 낮게 속삭이자 그녀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깜짝이야. 왔어? 이건 어때?”

“그건 좀 무거워. 초보자는 가벼운 게 좋아.”

“그래도 오래 신으려면 이게 낫지 않을까? 나중에 너랑 그랜드캐니언도 가려면…”

복숭아빛으로 물든 뺨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든 신발을 받아 들었다.

“그럼 이걸로 하자.”


계산대 앞에서 수영이 지갑을 꺼냈다.

“내가 살게.”

“아냐, 내가 사줄게.”

웃으며 그녀를 막았지만, 점원은 이미 수영의 카드를 받아 들고 있었다.

데이트마다 먼저 계산하려는 그녀에게, 결국 나는 말을 꺼냈다.

“나 돈 있어, 수영아. 학부 때 장학금도 받고 과외도 많이 했거든. 연애도 안 하고 돈 드는 취미도 없어서 모아둔 게 좀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뭐야, 최고의 신랑감이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신랑감이라는 단어 하나가 순식간에 머릿속 풍경을 바꿨다. 연애는 참 신기한 일이었다. 오늘에만 머무는 줄 알았던 그녀와의 행복은 자연스레 내일을 기대하게 했다. 그리고 내일은 또 그다음을 불러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처럼, 나는 멈추지 않고 수영과의 내일을 욕심냈다.



항상 혼자 오르던 그 산에, 수영과 함께 올랐다. 학교 뒷길을 따라 초입에 들어서자 이른 아침부터 등산객들이 오가고 있었다.

“우리 학교 뒤에 이런 산이 있었어?”

“응. 몇 년 동안 매주 혼자 왔지. 너랑 같이 오게 될 줄은 몰랐네.”


절반쯤 올랐을 무렵, 수영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숨이 가빠지고, 이마엔 땀이 맺혔다.

“잠깐만… 나 좀 힘들어.”

“여기 앉아. 물 좀 마셔.”

수영은 작은 숨을 몰아쉬며 작은 바위에 앉았다. 물병을 건네주니, 한 모금 넘기는 모습이 마치 아이 같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그녀의 이마를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얼굴이 더 붉어진 그녀가 숨을 고르며 웃었다.

“하… 너무 좋다.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좋아. 바람소리 듣고, 너랑 이렇게 앉아 있는 거.”

“이제 자주 이렇게 하자. 나랑 같이.”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나는 천천히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미 붉어진 수영의 뺨이 한 톤 더 짙어졌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나는 말했다.

“천천히 가자. 수영아.”


정상에 닿자, 수영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와… 내가 올라왔어!”


“기념으로 사진 찍자.”

우리는 하늘을 배경으로 얼굴을 맞댔다. 셔터음과 함께 화면 속에 우리의 웃음이 남았다.

수영이 가방을 열어 샌드위치를 꺼냈다.

“이거 직접 만든 거야?”

“응, 아침에.”

“너… 요리도 해?”

“요리라기보단… 간단한 건 해. 샌드위치, 파스타, 스테이크 정도?”

“그게 간단한 거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음에 해줄까? 뭐 좋아해?”

“나? 뭐든. 다.”

말이 헛나왔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처음 보는 그녀의 또 다른 얼굴이, 새삼 반가웠다.


내려오는 길은 가벼웠다. 손을 잡고 발맞춰 걷는 발걸음에, 산의 공기도 한결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산 아래에 다다랐을 때,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제희였다.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수영도 눈치를 챘는지, 조심스레 손을 놓았다.

“어, 제희야.”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여긴 내 동료 제희. 그리고… 알지? 이수영 교수님. 내 여자친구.”

제희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반갑습니다.”

수영도 밝은 목소리로 악수를 했다.

“네, 반가워요.”

짧은 인사가 오간 뒤, 제희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나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제희야, 부탁할게. 비밀로 해줘.”

제희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맨날 어딜 그렇게 가나 했더니… 여기선 조심해라. 빨리 미국 가라, 너.”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수영이 낮게 물었다.

“괜찮겠지?”

나는 잠시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입 무거운 친구야.”


우리는 다시 식당 쪽으로 발을 돌렸다. 첫 등산, 첫 셀카, 그리고 첫 연인이라는 이름. 행복이 멈출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일까, 나는 조금 더 욕심을 내 보기로 했다. 다가올 내일의 풍경에도, 변함없이 수영이 있기를 바라는 욕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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