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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 Jan 21. 2021

삐- 혈중 알코올 농도 0.02% 이상입니다

관제할 생각하지 말고 집에 가세요

나는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술이 무작정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가끔씩은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하고, 멀리서 보면 간접적으로는 재미있는 영향을 주기도 하니까. 누구에게는 슬픔을 위로해주는 말 없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근거가 없는 자신감이 솟게 하는 이상한 물약이 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만 술은 '곧 업무를 시작할, 업무를 하고 있는' 항공종사자에게는 치명적인 크립토나이트가 될 수 있다. 내가 탄 비행기를 관제하는 관제사가 만취상태로 관제 지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실제로, 2018년에는 일본의 모 항공사 부기장이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조종간을 잡으려고 했다가 체포된 사실이 있다. 발각된 이유도 코미디인데, 조종사가 술 취한 냄새를 맡은 공항버스 운전기사가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이 출동하게 된 것이었다. 음주 운전보다도 책임이 막중한 음주 조종을 막은 기사님의 투철한 안전 정신에 박수를. 비행 전 음주측정 절차가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측정하지 않아 측정기록이 없던 경우가 일본항공과 전일본공수 둘만을 합쳐도 1년에 500건 정도 있었다니! 그중에서도 몇 번이나 실제로 취해서 비행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도 절차를 중시하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술에 관대했다는 사실은 조금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조종사의 음주가 하나의 원인이 되었던 사고는 <아에로플로트 821편 추락사고의 재구성> 글에서 읽어볼 수 있다.


관제사도 음주 논란에 있어서 깨끗해왔던 것만은 아니다. 다른 항공종사자와 비교해서 표본이 적어 발각 염려가 없어 보였던 것뿐이지, 약 15년 전에는 음주 후 업무에 응했다는 기록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계속해서 항공종사자의 음주 문제가 발각되고 있어 최근에는 음주에 대한 추레한 인식이 많이 바뀌기도 했다. 국토교통부도 포스터 같은 것들을 만들어 음주 근절 홍보에 힘쓰고 있는 눈치다.


아주아주 재치있어서 마음에 든 음주 제한 포스터


항공종사자가 하는 일이 다수의 생명과 아주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항공종사자의 음주 상태에 대해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다. 조종사, 관제사, 운항관리사 등의 항공종사자와 객실 승무원까지 포함한 웬만한 항공업계 종사자는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 규정은 항공안전법 제57조 <주류 등의 섭취ㆍ사용의 제한>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제57조(주류등의 섭취ㆍ사용 제한)

① 항공종사자 및 객실승무원의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항공업무 또는 객실승무원의 업무에 종사해서는 아니 된다.
② 항공종사자 및 객실승무원은 항공업무 또는 객실승무원의 업무에 종사하는 동안에는 주류등을 섭취하거나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중략)
⑤ 주류등의 영향으로 항공업무 또는 객실승무원의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상태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주정성분이 있는 음료의 섭취로 혈중알코올농도가 0.02퍼센트 이상인 경우



따라서 항공종사자는 혈중 알코올 농도 0.02퍼센트 이상인 경우, 항공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 음주 운전 시 면허 정지가 되는 처분 기준이 혈중 알코올 농도 0.03퍼센트 이상인 경우이니까 그 보다는 엄격한 기준이다. 그리고 위 법령에 영향을 받는 국토교통부 고시 <항공교통업무기준>에서는 관제 연습을 하는 사람을 포함한 관제사는 반드시 근무 브리핑 시작 전 음주 측정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우리 관제탑의 경우에는 근무 시작 15분 전까지 브리핑실에 쇼업하고, 음주측정기를 신나게 훅- 하고 분 뒤에, 기록을 수기로 작성하고, 브리핑을 시작한다.


또한 법령과 마찬가지로 측정자의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2퍼센트 이상인 것으로 기기에서 측정한 경우 음주 측정기에서 'Fail'이 표시되게 된다. 가끔 기기가 고장이 나 술을 먹지 않은 경우에도 Fail이라는 심장 철렁한 글자를 내보내 주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실제 농도를 숫자로 표시해주는 모드로 재 측정해야 한다. 갑자기 딴 소리로 새는 것 같지만, '혈중 알코올 농도'라는 단어의 의미가 궁금해서 찾아봤다. 혈중 알코올 농도는 혈액 100ml당 알코올 비중을 가리키는 것으로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라고 하면 혈액 100ml당 0.1g의 알코올이 포함됐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 혈액 100ml에 알코올이 0.02g만 포함되어 있어도 나는 관제를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엄청난 소량인 것 같지만 사실 0.02g의 알코올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저러해서 음주 측정에 통과하지 못한 경우에는 관제 업무에서 배제한다. 집에 가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근무하러 갔는데 음주 측정기가 나를 집에 돌려보내는 창피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근무일 전 날에는 술을 자제해야 한다. 징역 살거나 벌금 3천만 원 내고 싶지 않으면 더더욱.


하지만 이렇게나 중요한 음주 측정 절차도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그 것'이 있었으니... 바로 코로나 되시겠다. 하나의 기계에 근무자 여러 명이 바람을 불어넣는 구조이기 때문에(물론 알코올 소독을 하지만) 침방울이라도 튀면 같은 기계를 쓴 모두가 감염 위험이 있어 절차가 임시 중단되었다. 대신 국토교통부에서 불시 음주 점검을 나오기도 하면서 보완책을 두고 있다. 이런 차에 궁금해져서 실제로 음주운전 단속은 어떻게 하고 있나 살펴보니, 신형 음주 감지기를 차 안으로 집어넣어서 운전자가 숨을 쉬면 나오는 미세한 알코올 입자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좋은 기계 또한 오차가 있다고 하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언택트로 정확히 음주 측정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피 뽑기는 싫으니까 그건 빼고 생각해주시길... 혹시 특허를 낼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술로 시작해서 다시 코로나로 끝나버린 것 같은 글이지만, 결국 이 글의 요지는 딱 하나다. 술 먹고 운전하지도, 관제하지도, 조종하지도, 정비하지도, 운항관리하지도 맙시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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