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고요 속의 외침
세상 모든 것이 늙듯이, 공항도 늙는다. 인천공항도 꽤 나이를 먹었다. 지은 지 20년 된 아파트를 두고 저 아파트는 이제 구식이야, 말하곤 하는데 인천공항도 이제 구식 공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우리 공항을 떠올리면 구식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밝은 이미지가 많이 떠올랐으면 좋겠다. 늘어나는 항공 수요에 빠르게 발맞추기 위해 얼마 전 4활주로도 성공적으로 열었고, 제2터미널 반쪽을 확장하는 시설공사도 진행 중이니까. 사실상 섬인 나라에서 거의 하나이다시피 존재하는 해외로 가는 관문이기도 하고. 고소한 라떼 느낌보다는 톡 쏘고 맑은 탄산수나 에이드 느낌이었으면 한다. 라떼도 그 자체의 멋이 있긴 하지만.
우후죽순 생겨나는 세계의 멋지고 아름답고 거대하기까지 한 세계의 최신 공항들과 비교했을 때에는 (내가 아주아주 사랑하는 공항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인천공항의 시설이 많이 늙었다. 그래서 *여객이 90퍼센트 이상 줄고, 운항 횟수는 약 60퍼센트 줄어든 지금을 기회다!라고 생각하며 여객 터미널과 에어사이드의 모든 낡은 시설들을 교체하고 바꿔버리고 있다. 얼마 전, 반구식정도 되어 보이는 우리 1터미널 관제실의 책상들도 깨끗한 새 책상으로 전부 바뀌었다. 한 2주 정도 공사를 진행한 끝에 조금 더 쾌적한 환경에서 관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여객은 90퍼센트나 줄었는데 운항편수는 60퍼센트밖에 줄지 않았을까? 요즘 직구를 해본 사람이라면 느꼈을지도 모르는데 항공 해외배송이 참 빨라졌다. 화물기 운항편수가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글 <관제용어를 배우자, 관제사 따라잡기 초급 편>에서 언급했었는데 우리는 평소에 관제업무를 할 때 개인 헤드셋을 착용하지 않는다. 스피커를 크게 틀어두고 주파수로 송신되는 내용을 듣는다. 관제 주파수 교신 말고도 지상 견인 교통과의 무전 교신, 타 관제기관과의 전화 협의가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스피커로 관제교신을 하는 만큼 관제실은 엄청나게 조용한 편이다. 관제석이 하나뿐이라면 그야말로 진짜 '고요 속의 외침' 느낌이다.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관제 교신만이 클래식마냥 울려 퍼진다.
관제실 내부가 별로 시끄러울 일도 없고, 딱히 부산스러운 일이 있지도 않은 데다가 어지간하면 수다를 잘 떨지 않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나는 관제실이 조용하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1터미널 관제실의 시설개선 공사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그동안 고요 속의 관제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되새겼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 였던가. 책상을 전부 교체하고 바닥을 뜯어 전선을 정리하는데, 드릴 소리에, 쿵쿵 거리는 망치 소리에, 도저히 스피커로의 관제교신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치달았다. 사실 공사 소음보다 스피커 볼륨이 더 크도록 조절해서 교신을 할 수 있긴 한데, 일단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걸 느꼈다. 안 되겠다 싶어 달려가 개인 헤드셋을 가져와서 장비했다. 마치 래퍼가 귀에 바로 때려 박는 것처럼 관제 교신이 생생히 들리자 그제야 좀 만족스러웠다.
그야말로 정숙한 독서실 분위기의 관제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해와서 그럴까, 내가 느끼는 선배 관제사들은 여러 감각들에 조금 민감해 보인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작은 소리를 잘 듣기도 하고, 심지어는 타워가 흔들리는 것까지 알아맞힌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 나는 도저히 느끼지 못한 흔들림을 맞히시곤 봐~ 흔들렸잖아~ 하시는데 소름이 돋았었다. 이게 다 관제를 하면서 생긴 예민함과 동물적인 감각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우리는 외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관제사는 여러 가지 감각을 모두 활용해서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교통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시각을 활용하고, 관제 교신을 듣고 말하기 위해 청각도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귀신같은 육감도 필요한 것 같다. 화재 등 비정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재빨리 알아차리고 순발력 있게 초기 대응을 해야만 하는 업무라서 그렇다. 집중력도 아주 중요하다. 교통이 몰리는 피크시간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뇌 용량을 끄집어내서 집중하고, 조금 풀렸다 싶으면 다시 뇌를 쉬게 했다가, 뭐 그런 느낌.
얼마 전 관제사를 주제로 하는 유튜브에서 관제사의 직업병(?)에 관련된 영상을 짤막하게 보았는데 별로 공감은 안되었다. 관제사가 누군가에게 어떤 걸 부탁하면 부탁한 사람이 그 부탁을 그대로 다시 말해야만 만족한다는 내용의 영상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혈육에게
"빨래 좀 해줄래? 찬물로, 헹굼은 두 번 먼저 해 줘. 그다음엔 섬유유연제 넣어서 다시 헹구고, 탈수 한 다음에 건조도 부탁해."
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알았어.'라는 대답만 들으면 된다. 굳이 혈육이 "알았어. 찬물로, 헹굼은 두 번 먼저 할게. 그다음엔 섬유유연제 넣어서 다시 헹구고, 탈수 한 다음에 건조도!"라고 대답하길 바라지 않는다. 다 듣기 귀찮기도 하고.
그치만 그게 관제실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관제사는 **반드시 복창이 필요한 사항들은 조종사나 조업사가 전부 다 말해주길 바란다. 잘 알아들었는지 확인해야 하는 필수적인 절차이니까. 이게 관제실이 조용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유도로 이름, 후방 견인 및 이동 허가 같은 것들.
한 20년 후에는 나도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똑같이 따라 해 주길 바라는 직업병이 생기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