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는 아니고 숙명 같은 건데요...
관제사는 우리집 말고 가끔 가서 자기도 하는 별장이 있다. 내가 쓰는 별장은 공항 안에 있는 60-100m 정도 되는 뷰 맛집인데, 걸어서 각종 식당이 즐비한 터미널까지 1분 정도 되는 찐 공(항)세권인 데다가 오션뷰, 마운틴뷰, 에어플레인뷰 등 뷰란 뷰는 다 가지고 있는 역대급 입지다. 관제탑 말이다.
관제탑에서도 모든 뷰를 다 누릴 수 있는 로열층이 따로 있는데, 그 건 바로 탑층에 위치한 관제실이다. 관제실에선 비행기도 보이고 구름도 보이고 운 좋으면 무지개도 만난다. 날씨가 안 좋으면 퍼붓는 비도 보고 번쩍거리는 번개도 광각으로 마주한다. 공항이 다 보이는 전망대 같은 모습이라서 관제탑에 견학 오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경거리기도 하다. 반대로 비행장 관제사들이 다른 높은 관광지 전망대에 가면 별 감흥이 없다고들 한다. 난 좋던뎅.
고급진 영종도 별장에는 거의 매일 가지만 거기에서 자는 건 나흘에 한 번이다. 우리 팀의 현장 교대근무 스케줄은 4일 주기인데, 그중 야간 근무를 하는 하루는 저녁과 새벽시간을 관제탑에서 지내기 때문에 나는 진짜로 나흘에 한 번은 반드시 외박한다. 저녁에 털레털레 출근해서 어두운 밤을 보내고 햇살 쏟아지는 아침에 퇴근하면서, 피곤에 찌든 몸과 마음을 끌고 집으로 들어가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과 반대로 걷고 있다는 느낌. 물리적으로는 느낌이 아니라 진짜이긴 한데..? 아침을 하루의 시작으로 여기는 일상과, 하루의 끝으로 여기는 일상에는 큰 차이가 있구나 싶다.
관제 일을 20년간 한다면, 단순하게 계산했을 때 무려 5년 정도는 외박하는 삶을 살게 된다. 나 스스로는 '잠은 집에서 자야지'라고 좀 딱딱한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인데도 4일 중에 하루나 바깥에서 자는 모양이 되었다. 다행히도 관제탑에서 밤을 지내는 것 자체는 이제 많이 익숙하다. 숙면을 못 취하는 건 아직 비슷하다. 일하는 중엔 언제라도 비상이 생길 수 있다 보니 자다가 자꾸 깬다.
나이트 근무를 하며 밤을 꼴딱 새는 다른 업무보다야 자는 시간이 있으니 좀 편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아무리 쉬는 시간을 갖더라도 밤에 근무하는 건 좀 (많이) 힘들다. 도대체 일하며 밤은 어떻게 새나 싶다. 만약 누군가의 대체근무를 해야 해서 두 번 연속으로 밤에 근무하기라도 하면 실시간으로 수명이 팍팍 깎이는 느낌이 든다. 특이하게 우리 팀원들은 그렇게 아메리카노를 좋아라 하시는데 직접 겪어보니 카페인 포션을 달고 살지 않을 수가 없다.
어제도 출근하며 가족들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다녀올게! 내일 봐~' 저녁 출근하는 내 모습이 이제 제법 충성스럽게 관제탑을 지키는 강아지 같다. 근데 관제탑 주인은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