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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 Oct 24. 2021

괌 여행을 취소(당)했다. 더해서,

여행만 취소댓으면 이러케까진 화가 안 났을거애오

 받고 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관제사 또한 1인분의 몫을 하기 위해 관제탑에 올라가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 공항 안에서의 이동지시나 이착륙 관제를 하는 비행장관제사의 경우 감독 없이 혼자서 일하기까지 평균적으로  1년이 소요된다. 비행장관제사 말고 접근관제사나 항로관제사로  몫을 다하고 싶으면  2-3년의 교육 훈련기간이 필요하다. 내가 하는 에이프론 관제는 길면 1 이상, 짧으면  7-8개월 정도의 훈련 기간을 필요로 한다. 입사자는 모두 관제업무를 하는  필요한 관제사 자격증과 항공영어구술능력시험 등급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훈련만 받는  이렇게나  시간이 쓰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들던 교육기간을 버티게 해 줬던 건 이게 다 끝나고 *레이팅을 따면 즐겁게 해외여행에 다녀올 수 있겠구나 하는 설렘이 아니었을까 한다. 코...뭐라고 시작하는 이름의 머시깽이 때문에 항공편과 호텔 예약과 여행의 모든 것을 전부 취소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레이팅(Rating) : 항공교통관제사로서 감독 없이 단독으로 관제석에서 근무할 수 있는 자격. '관제업무 한정'이라고도 부른다.


2019년 그 때, 당장 오늘 내일 매일이 긴장상태고 힘든 와중에 당연히 해외여행 자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교육받던 중에 같은 조에 계시던 교관님께서 넌지시 물어보셨다.


"회사 오기 전에 해외여행은 다녀왔어요?"

"합격하고 임용 전까지 기간이 길지 않아서, 일본에만 잠깐 다녀왔습니다."

"얼른 갈 곳 하나 정하고 비행기부터 예약해요. 레이팅 따면 해외여행 다녀와야지."

"아..?ㅎㅎ 생각해 보겠습니다."


훈련 도중에 해외여행 날짜를 빨리 잡으라는 교관님 말씀이 처음에는 이해도 안 됐고, 농담인지 진심인지 구별도 못하겠어서 그렇게 대화를 넘겨버렸던 거 같다. 얼마 후 교관님은 또 그 이야기를 하셨다.


"어디 갈지 정했어요?"

"아? 아뇨, 아직 못 정했습니다."

"우리는 휴가를 붙여서 쓰면 길게 쉴 수 있어요. 내년 봄쯤 출발하는 걸로 빨리 비행기 예약하라니까."


플랜에 없던 일이었지만 교관님 말씀을 듣고 '그래도 나름 공항에서 일하는 신분인데 바깥 여행 좀 다녀오면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교관님의 마음은 '아이야 너 힘들어 보이니 해외여행이라도 예약하고 그걸 기다리며 이 고통을 잊어라.'... 였던 작은 배려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때가 2019년의 끝으로 막 치닫던 겨울이었으니까, 흘러왔던 대로 보통의 시간에 맞춰 내가 레이팅을 딸 수 있는 날짜를 나는 빠르면 2020년 4월, 늦으면 5월로 예상했다. 힘들었던 훈련을 마치고 그야말로 쉬러 바깥으로 나가는 여정이었기에 나는 컨셉을 '쉼'으로 잡고 6월에 향할 안식처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괌'!

괌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지였다. 꽤 가까운 거리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그리고 나는 가본 적 없는) 휴양지인 데다가 새로 연 2터미널에서의 출발이 가능했다. 2터미널은 가본 적 없는 동생에게 공항을 구경시켜주기에도 좋았다. 그렇게 대강 날짜를 확정 짓고, 휴양이라는 컨셉에 맞게 좀 쉬기도 할 생각으로 괌에 새로 여는 호텔도 예약했다.



어느 관제사 : '이 사진을 보니 갑자기 화가 나'


다시 그 관제사가 : '설마 레이팅을 못 따서 취소하는 거 빼고 또 못 갈 이유가 생길 줄이야.'



...처럼 나는 괌으로의 여행에 들떠있었다. 여행 계획의 첫 순서인 교통편과 숙소 예약도 전부 해결, 이제 여행 하루하루의 날들에 뭐 할지만 정하고 다가오는 6월 14일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는데..!!


2019년 연말 한국사람들의 모든 해외여행 계획이 취소되도록 만든 그 사건이 터지고 나는 마음으로 울면서(ㅠㅠ) 비행편과 호텔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6월에도 여행은 글렀겠지? 하며 미련 가득한 채로 취소 버튼을 눌렀다. 여행은 다시 갈 수 있으니까,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여행이 취소된 것에 더불어 훈련관제사로서의 훈련기간도 늘어났다. 일 1,300편이던 교통량이 반의 반토막이 났으니 훈련이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빈 주파수에 교관님과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늘었고, 아무리 늦어도 5월엔 보겠지 했던 레이팅 시험은 6월이 되어도 보게 해 주겠다는 소식이 없었다. 동기와 '우리 이러다가 입사 1년 다 돼도 레이팅 없는 거 아냐?ㅋㅋ'라며 농담 섞인 걱정을 주고받았다.


거짓말처럼 줄어든 교통량 덕분에 대체 시험은 언제 볼 수 있을까, 종종거리며 기다리던 차에 거짓말처럼 작년 7월에 레이팅을 딸 수 있게 되었다.(글 링크) 전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비행기가 적어 그나마도 가장 바쁜 시간대에 분리되어있는 관제석을 합쳐서 시험을 보게 해 주셨다. 이제 드디어 1인분 몫을 하는 구나라는 생각에 기쁘다가도, 비행기는 언제 늘어나는 거야라는 생각에 우울하기도 했다.


슬프게도 아직 해외여행은 미정이다. 과연 언제쯤에나 2터미널에서 비행기 타고 괌으로 가서 그 호텔에서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근데 요즘에 서서히 뉴스와 기사는 백신 맞고 해외여행 갈 수 있어요!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 11월 15일부터는 기다리던 양국 간 트래블 버블 시행으로, 백신 접종을 완료하면 격리 없이 싱가폴로의 해외여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슬슬 항공업이 기지개를 켜고 있으니 모두들 곧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아차차, 그전에 2터미널에 있는 쉐이크쉑이나 먼저 문을 열어줬으면 좋겠다. ^-^



1터미널 카페 안내문. 상주직원 모두는 나처럼 문 닫은 시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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