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이 Jul 20. 2024

사랑을 하는 보호자란, 어쩌면 무적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크론병 환자의 보호자입니다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던 하늘이 화내듯 비를 쏟아내기를 며칠째, 처음 뵙기로 한 분과의 약속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약속일이 얼마 안 되어 장마가 시작되었고, 전날까지 무지막지하게 쏟아진 비에 걱정이 커졌다.



괜히 오시게 했나, 집에 가시는 길에 위험하면 어쩌지...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걱정을 온몸에 둘둘 두르고도 많은 것을 시도하는 탓에, 주변 사람들은 내가 걱정이 많다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 물론 나도 스스로의 성향에 익숙해져서인지 걱정을 대비할지언정 무르지는 않는다. 그저 대비하고 걱정을 표현할 뿐. 어떤 일은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이 있으니까.



걱정이 무색하게도 우리의 약속 당일, 부슬비로 바뀌던 비는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슬쩍 사라졌다.








무슨 이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까? 평화님을 기다리던 식당 안에서 고민했다. 외향인이건 내향인이건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어색하기 마련이라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몇 개월 만이라 어색한 마음반 설렘반이었다.



알게 된지 채 한 달이 안 된 사이. 그마저도 브런치라는 인터넷 공간에서 만난 사이.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몹시 적은 사이일 것이 분명했지만, 우리에게는 강력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만남으로 이끌었다.



크론병을 앓는 남편을 둔 아내



공감이라는 것은 정말 신기한 감정이다. 어떠한 접점도, 일면식도 없는 여자 둘을 장마철 한중간에 만나게 했으니까. 크론병마저도 각자의 배우자가 가진 병명이었지만, 부부는 곧 하나이기에 우리의 문제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생각에 잠겨있던 내게 찾아온 평화님은 밝게 웃는 분이셨다. 마주치자마자 대뜸 꽃다발을 건네던 평화님. 왠지 얼굴을 보자마자 나와 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한하게도. 평화님의 눈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도 비슷해보일 것 같았달까.



밝은 마음이라는 꽃말을 내게 품에 안겨준 그녀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남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당연하게 집중했다. 그건 내 남편의 병이기도 하니까. 우리에게 식사는 구실에 불과했다. 그저 같은 이야기를 함께 나눌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진심어린 걱정이 가득 묻은 말이 조용조용 흘러나왔다. 머릿속에 평화님의 말씀이 하나둘 새겨지는데, 왜일까, 나는 그냥 크론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아닌 느낌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 하고 있는 말에 잔뜩 집중한 입매, 오랫동안 다듬어 온 것이 분명한 듯 정돈된 말로 나오는 생각들, 그리고 같은 현실을 사는 우리이기에 할 수 있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까지.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고 있지만, 모든 생각은 남편을 향한 것들이었다.



사랑이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부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사랑이 잔뜩 묻어나오는 것은 또 다른 일. 기침과 사랑은 숨기지 못한다는 오래된 격언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아, 이 분은 진심으로 배우자를 사랑하고 계시구나. 처음 만나는 내게도 뚝뚝 흘러넘치게 느껴질만큼 행복한 사랑을 하고 계시구나.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갖게 된 자리. 우리는 집중을 잃지 못했고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대화할수록 배우자의 공통점, 우리의 공통점에 거듭 놀라던 우리는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어, 저희는 이럴 때 아파해요. 여기는 이렇게 해서 괜찮아졌는데 교수님하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와, 신기하다. 저희도 그래요. 이건 저희도 생각해봐야겠어요. 저번에는 병원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크론병은 아직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베어지지 못한 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 수년, 십수년을 난치병과 싸워온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은 같은 적과 싸우던 동료. 우리에게는 각자의 방향에서 적의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할 사람이 생겼다.



사랑하는 이를 병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호자라고 부른다.








함께 하는 시간 내내 평화로웠던 평화님과 헤어지고 난 뒤, 이야기에 취해버린 나는 소담스러운 꽃다발을 손에 쥐고 남편을 불러냈다. 고작 20분 걷는 거리에 집이 있었지만, 기분 좋은 감정을 좀더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사그러들게 두고 싶지 않았다. 걷고 싶었다. 다만 혼자 걷고 싶지 않았다. 같이 걷는 게 좋다는 걸 크게 느낀 직후였다. 얼굴 표정, 말내용, 눈빛, 몸짓 하나하나에 사랑을 가득 담은 사람과 대화하고나니 나도 내 사랑이 보고 싶었다. 넷플릭스와 함께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던 신랑은 잔뜩 투덜대면서도 이내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집앞 마트를 순회하며 대화했다. 기억을 되짚어가며 재잘대던 말의 끝자락, 나는 더 많은 보호자들과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던 신랑이 말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었는데, 잘 만났네.



지금도 출처모를 YMCA 노래를 흥얼대며 씻고 나와 로션을 바르고 있는 신랑. 3년이 넘게 로션 바르는 교육을 받아서인지 그의 몸에는 이제 윤기만 흐른다. 잠을 통 못 자서인지 어제부터 배가 조금조금 아프다면서도, 여전히 노래부르고 웃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신랑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옆에 있어준 뒤로 안정을 찾았고, 병이 나아가고 있으며, 통증이 와도 두렵지 않게 바뀌었다고. 재미있는 건 나도 그렇다는 점이다. 나도 그와 함께한 후로 안정이라는 기분을 온몸으로 느끼고, 건강해야 할 이유가 생겼으며, 언제든 내가 아플 때면 보호해 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보호자는 환자가 있기에 보호자이고, 그렇기에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우리는 서로가 아픈 것을 무심히 보지 않는다. 서로를 위해 아프지 않으려 노력하고, 서로를 위해 아플 때면 온 정성을 다한다. 이러한 시간이 하나둘 쌓이다보면 우리는 언젠가 아프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다.



평화님의 밝은 마음을 받아서일까. 핫팩을 배에 올려두고 자리잡은 신랑은 여전히 웃고 있다. 늘 내 감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진하게 느끼는 그가 기분좋은 이 밤, 나에게는 오래 함께할 동지가 생겼다.



✨저와 평화님이 만나게 된 글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는 게 다른 분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같은 병을 앓고 계신 분들, 보호자분들 친하게 지내요 :)


❤️이 글을 읽고 마음에 드셨다면 브런치를 구독해주세요.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찾아올게요. 감사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크론병 환자에게 도움이 된 3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