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여전히 천국이 맞다
4년 만에 다시 만난 치앙마이는 내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길을 지나며 보이는 식당의 메뉴도 한국보다 비싼 경우가 많았고, 저렴하면서도 맛있게 한 끼 먹을 수 있던 야시장이 있던 자리에는 고급 호텔이 생겨 있었다. 좋아했던 장소들에 신랑을 데리고 다니면서 행복하게 추억을 곱씹으려 했건만, 계산할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게 되는 내가 되려 낯설었다.
일 주일쯤 되었을까, 신랑은 치앙마이가 생각보다 싸지 않은 것 같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체로 한국보다 싸기는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저렴하지 않은 것 같다고. 신랑은 주부이기에 장바구니 물가나 외식 물가에 더욱 민감한 편이고, 어릴 때 힘들게 산 기억이 있어서인지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도 매우 강한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날도 있었다. 사과 한 봉지를 사오겠다며 나가 한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기에 전화를 했더니, 동네 마트 다섯 군데를 돌아도 비싸기에 빈손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했다. 사과 7~8알에 만 오천 원은 너무 비싼 것 같다며 지친 얼굴로 돌아온 그를 보는 마음은 정말이지 편치 않았다. 빠르게 오르는 물가는 주부로 사는 그에게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비싸서 고민하는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아도 되게끔 하고 싶은 것도 치앙마이에 온 이유 중 하나였다. 정말 마음껏 쇼핑하고 또 원하는 대로 사먹게 해주고 싶었는데, 신랑의 입에서 비싼 것 같다는 말이 나오고 또 그 말에 조금은 동의하게 되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괜한 선택을 한 것일까, 치앙마이에 온 것이 잘한 일인지 고민이 되었다.
며칠 후, 어떤 고민도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는 숙소를 옮겼다. 호텔에서 장기 투숙을 하려고 했지만 청결하지 못한 환경과 구조적 불편함 때문에 콘도로 이사했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금액을 손해보기도 했다. 약간의 환불과 실랑이 과정, 그리고 계속되는 이동에 신랑은 점점 지쳐갔다.
다행히 옮긴 콘도는 꽤 살만한 곳이었고 현지인들이 많이 산다는 산티탐에 위치해 도보권으로 갈 수 있는 맛집도 많았다. 이제 좀 돌아다니려나 싶던 신랑은 그동안 못 쉰 걸 다 쉬겠다는 모습으로 며칠 간 누워만 있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걸어서 마트도 가보고 집 앞 음식점도 다녔는데, 확실히 낮아진 물가에 신기해하며 점차 살아나는 것 같았다. 점점 휴대폰 속 지도 위를 누비던 그는 또다른 마트를 가봐야겠다며 일어났고, 이제야 좋아하는 걸 하겠다고 하는 신랑을 보고 기뻐서 냉큼 따라나섰다.
마트에 가던 길, 우리는 사람이 잔뜩 모여있는 밥집을 발견했다. 우리 콘도에서 마트까지 가는 길은 현지인들이 사는 맨션과 아파트먼트가 많은 지역이었는데, 현지인이나 외국인 너나 할 것 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 심지어 모두 같은 모양의 밥이었다. "이건 무조건 맛집이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바로 구글 맵을 켜서 후기를 확인했는데 하나같이 맛있다는 내용들 뿐.
신랑을 쳐다보자 이미 반쯤 식당에 들어가 있었다. 계획했던 밥집이 있었지만 흥미를 가졌을 때 한껏 북돋워줘야 하니까. 배불러야 쇼핑도 즐거울테니 우선 밥부터 먹자는 생각으로 마지막 남은 자리에 앉았다. 영어 메뉴판을 가져다 주셔서 열심히 훑어봤는데, 아무리 봐도 모두가 먹고 있는 메뉴는 찾을 수 없었다. 밥 위에 돼지고기가 잔뜩 올려진 덮밥 형태의 음식이었는데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없는 것. 벽에 붙은 메뉴를 번역기를 돌리면 나올까 싶어 휴대폰을 가져다 대보았지만 도통 번역도 되지 않더라.
난감해하는 우리를 보고 온 아주머니와 한참을 얘기했지만 뜻은 통하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옆 테이블이 먹고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알겠다며 두 손가락을 보이고 가셨다. 이름도 가격도 모르는 상태로 주문해서 조금은 찜찜했지만 가득찬 홀을 믿기로 했다.
얼마 후 나온 음식은 정말 커도 엄청나게 컸다. 치앙마이에 와서 먹은 음식들은 대체로 양이 적었고 태국인들은 많이 먹지 않는 편이라고 들었기에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여기를 시작으로 가본 현지인 맛집들 중에는 양이 정말 많은 곳들도 꽤 되더라. 우리가 주문한 건 팟카파오무쌉이라는 돼지고기 바질 볶음 덮밥이었고, 거의 국민 음식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대부분의 밥집에 파는 메뉴였다. 약간 우리나라의 제육볶음 같은 느낌이랄까. 워낙 관광객들이 훨씬 많은 지역에 머물다보니 몰랐던 것일뿐 이미 유명했던 메뉴.
엄청난 크기의 접시에 놀라고 사이드로 주신 튀긴 계란 프라이와 밥의 양에 한 번 더 놀랐다. 밥에 고기를 잔뜩 얹어 한 입 먹었는데, 세상에나, 너무 맛있는 것이다! 간장 양념으로 볶은 것이니 사실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지만 강하게 나는 불맛이 그 맛을 더 살려주는 것 같았다. 한참을 먹다가 테이블마다 올려진 고추절임(?)도 발견했다. 현지분들이 다들 드시기에 우리도 살짝 뿌려 먹어보았는데 이게 또 별미였다. 신랑도 정말 양많고 맛있다며 열심히 먹었고 나도 오랜만에 양껏 먹는 기분이었다.
정말 맛있게 먹었지만 다 비우고나니 조금의 걱정이 찾아왔다. 치앙마이 어느 식당에 가도 양이 적은 편인데 여기는 많으니까 당연히 비싸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천원 대의 밥값을 충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상황에서 간 것은 아니었지만 가격도 모르고 주문했기에 드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건 나의 경우였고 신랑은 걱정이 꽤 컸던 것 같다. 벽에 붙은 게 메뉴가 아니고 사실은 그릇 크기대로 받는 것 아니냐면서 한 그릇 당 200바트(한화 약 8,000원 정도)씩 받으면 어떡하냐며 걱정이 많았다. 한국보다 낮아진 물가만큼 외식비에 써도 괜찮은 비용의 역치값도 많이 낮아진 신랑이었다.
걱정을 없애는 건 간단하다. 빨리 부딪히면 된다. 신랑의 걱정이 터질만큼 커지기 전에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 가격을 물었다. 직원 분은 80바트라고 했고 나는 160바트를 주섬주섬 꺼냈다. 다 건네주니 웃으면서 80바트를 다시 주었고, 의아한 표정으로 있자 총 금액이 80바트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아니, 한 그릇에 그러면 40바트밖에 안 한다고? 환율을 세게 쳐도 한화로 1,600원이 안 되는 금액이었다. 한 그릇에 1,600원인데 맛있고 양까지 많다니. 가격을 들은 신랑도 방긋 웃었고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을 나왔다.
마음이 편해져서일까, 점차 밥집이나 카페의 가격들이 눈에 들어왔다. 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은 가봐도 좋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평점은 괜히 높은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 이따가, 내일, 모레 이런 식으로 가볼 곳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은 우리만의 간단한 치앙마이 조식이었다. 마트에서 팔던 튜브 형태의 버터와 꿀을 식빵에 발라 샌드위치를 만들었고, 국민 커피라는 가루 커피를 생수에 흔들어 마시니 꿀맛이었다. 기분 좋게 아침을 먹은 우리는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구글 리뷰를 보니 가격도 저렴할 뿐더러 신랑이 치앙마이에 와서 사랑에 빠진 오렌지 커피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렌지 커피는 나도 한국에서 몇 번 보지 못한 비싼 커피였는데 치앙마이에 오니 꽤나 흔하고 값싼 메뉴였다. 게다가 직접 짠 오렌지 주스로 만들기까지 하니 신랑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랑에게 오렌지 커피를 사주고 나는 타이티를 마셨다. 신랑이 오렌지 커피에 빠졌다면 나는 타이티에 빠졌다. 돌이켜보면 4년 전에도 타이티를 굉장히 좋아했던 나는 타이티 가루를 잔뜩 사왔었는데, 집에 와서 아무리 해먹어도 치앙마이에서의 맛은 나지 않았었다.
다시 와서 먹은 타이티는 역시나 맛있었고 특히나 가격이 저렴해서 놀라웠다. 신기하게도 맛은 거의 비슷하지만 카페마다 가격이 다른데, 대체로 테이크아웃 전문점에서는 단돈 20바트(한화 약 800원)면 먹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맛이 떨어지는 게 아니고 똑같이 맛있다는 점. 심지어 얼마 전 길가다 들어간 카페에서는 가루 두 봉지에 우유 거품까지 올려주는데 35바트(한화 약 1400원)밖에 하지 않았다. 오렌지 커피든 타이티든 정말 실컷 먹고 가야할 것 같은 느낌.
산티탐에 오고 우리의 치앙마이 살기에 대한 감상은 굉장히 달라졌다. 가격 비교를 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꿈같은 생각은 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값싼 물가를 누릴 수 있는 치앙마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40바트로 먹을 수 있는 밥집은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60-80바트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정말 무궁무진하게 많다. 카페도 마찬가지. 빠른 와이파이와 빵빵한 에어컨을 누리고 싶다면 커피 한 잔에 100바트 정도는 써야겠지만, 선선한 그늘에서 멍 때리며 휴식할 만한 카페는 35-45바트 만으로도 충분히 많다. 심지어 맛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요즘의 우리는 웃으며 말한다. 우리 이렇게 두 달 넘게 지내다 한국 돌아가면 바깥에서 아무것도 못 사먹는 것 아니냐면서, 어쩔 수 없이 치앙마이에 다시 와야될지도 모른다며 웃는다. 이렇게 신랑이 농담하며 원하는 것들을 마음 편히 먹는다는 게 나로서는 너무나 기쁜 마음. 아직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고 충분히 즐길 날들도 많으니 정말 마음껏 누려야지. 나만의 욕심이겠지만 치앙마이 물가도 한국 물가도 많이 오르지 않으면 좋겠다 :)
✨본 브런치북은 신랑과 함께 하는 치앙마이 살이를 담고 있습니다. 이전 화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바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