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원팀으로 이뤄낸 집안의 평화
신랑과 치앙마이에 도착하고 초반 4일은 호텔에 머물렀다. 원래 계획은 숙소를 직접 잡아보자는 원대한 것이었으나, 워낙 불안도가 높은 우리는 설령 좋은 숙소가 있더라도 미리 구해놓고 가자는 쪽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매일 청소해주고 청결함을 유지하는 호텔에서 4일을 묵고, 중간에 별로였던 숙소를 환불하는 대과정을 거쳐 입성한 첫 콘도. 진정한 치앙마이 한달살기는 장기 숙소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안전하고 깔끔한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우리에게 첫 콘도에 대한 기대감은 꽤 컸다.
그리고 그날은 도마뱀과 바퀴벌레를
하루에 모두 잡은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지난한 체크인 과정을 거치고 막 입주한 우리는 대청소부터 시작했다. 주부라는 직업 정신이 매우 투철한 신랑은 곳곳의 먼지부터 체크했고, 나는 눈에 보이는 하자들을 점검했다. 꽤 오래된 콘도라서인지 사소한 하자들도 많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냉매가 완벽하게 빠져 있는 에어컨이었다. 에어컨이 두 개나 있으면 무얼 하나, 뜨뜻한 바람만 잔뜩 나오는 것을... 자칫하면 또 이사를 해야 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안고 오피스에 연락했으나, 순식간에 수리 기사님이 들락날락 하시면서 모든 것을 고쳐주셨다.
체크인 이후부터 아무것도 못 먹고 청소하고 사람을 맞이하느라 힘들었지만, 쓸고 닦은 방안에서 시원한 바람을 쌩쌩 맞고 있자니 조금씩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이 떨어진 나는 슬슬 저녁을 먹으러 나가볼까 했지만 신랑은 마무리하고 나가야 마음이 편하다며 화장실을 청소하러 들어갔다. 그런데 청소하던 신랑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이유를 물어도 아무 대답 없던 신랑은 잠시후 우울한 표정으로 나와서 말했다.
바퀴벌레가 있는데… 엄청나게 커…
바퀴벌레 정도는 많이 잡아보았다던 신랑은 몹시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치앙마이에 오기 전부터 아주 큰 바퀴벌레가 나올 수도 있다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너무 컸다고 한다. 4년 전의 내가 한달살이할 콘도에 입주하고 겪었던 상황과 똑같았다. 물론 이전에 겪었다고 해도 바선생이 싫은 건 당연한 일. 대체 어디에 있길래 신랑이 화장실 문을 활짝 열고 나왔나 생각하며 주춤주춤 다가가 보았다. 샤워부스의 미닫이 문 사이에 끼인 바선생은 옴싹달싹 못한 채 끼어서 버둥거리고 있었다(글로 묘사하는 지금도 다시 생각나서 소름이 끼친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까 수리 기사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들락거릴 때 발견했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는 의미없는 일이었다. 이걸 어떻게 잡아야 하나 한창 토론을 하던 우리는 일단 입주한 첫날이니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오피스 매니저에게 연락해 보았다. 청소가 잘못 되었거나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항일 수 있으니 해결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정말 한 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친절했던 오피스 매니저로부터 빛보다 빠르게 “No”라는 답변을 받았고, 절망한 채 신랑에게 말했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두드리던 동안 내내 화장실 안에서 바선생을 조우하고 있던 신랑은 말했다. "나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오, 우리 신랑 멋진데? 라고 생각하며 다시 슬금슬금 화장실에 들어가보니 그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다. 얘는 별로 크지 않다. 한 번에 잡을 수 있다…” 엉거주춤 서서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신랑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솔직히 귀여웠다. 그리고 너무 고마웠다. 나에게 잡으면 안 되냐는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아줘서. 왜냐면 나도 무서웠으니까ㅎㅎ
우리는 합동 작전을 쓰기로 했다. 일단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서 바퀴약을 사기로 했고, 내가 집을 지키고 있기로 했다. 바선생이 열심히 버둥거려도 미닫이 문에서 나올 가능성은 적어 보였기 때문. 바로 앞에 세븐일레븐이 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돌아온 신랑은 돌돌 만 휴지를 한 손에 쥐었고 다른 한 손에는 비닐 봉지를 쥐었다. 나는 한 손에 바퀴약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미닫이 문을 열 준비를 했다. 당연히 화장실 문은 닫았다. 그 공간 안에는 오직 우리 그리고 바선생뿐, 바선생에게 탈출로는 없었다. 그리고 “한다!”라는 외침과 함께 시작된 우리의 싸움은 신랑의 활약으로 다행히 빠르게 종료되었다.
비닐봉지에 밀봉된 바선생은(살아있었다) 바로 외부로 옮겨져 쓰레기통으로 안착했고 우리는 기진맥진해서 소파에 누웠다. 사실 정확하게는 나만 누웠고 신랑은 다시금 이곳저곳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불안한 채로 쉴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휴대폰을 바라보던 내 눈앞에 뭔가 휙휙 하고 움직였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이번엔 도마뱀… OH MY GOD… 태국인들은 찡쪽이라고 부르며 귀여워하는 도마뱀은 밖에서는 귀여웠지만 내 집 안에서 보니 조금은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바선생보다는 나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신랑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보았다.
순식간에 내 뒤로 이동한 신랑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바선생도 잡은 용감한 내편이었는데 바선생의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일까. “나 저건 진짜 못 잡겠어. 저건 밍이가 잡아주면 안 돼?”라고 말하며 내 옷깃까지 잡고 떨고 있는 신랑. 의도치 않게 나 vs. 도마뱀의 대치 상황이 되어버렸다. 해결책은 오직 불청객이 나가는 것뿐이었다. 찡쪽과는 같이 살아볼까 혼자 생각했지만 나랑 평생 살쪽은 이쪽이니까, 이쪽 편의 말을 들어야지 :)
비장하게 마음을 먹으니 왠지 긴장되면서 손에 땀이 찼다. 나도 신랑을 따라 휴지를 돌돌 말아 한 손에 쥐어보았으나 녀석은 너무나도 빨랐다. 바닥으로 슥슥 쓸어서 밀어내보려 하면 자꾸만 안으로 들어오는 통에 뒤에서 신랑이 소리지르는 소리가 아주 우렁찼다. 죽이는 건 내가 더 싫고 어떻게든 살려서 내보내려고 유리컵에 가둬보려 했지만.
와장창!
무슨 유리컵이 이렇게 쉽게 깨지는지! 결국 유리 조각까지 난장이 되어버린 우리의 집, 우리의 첫 콘도, 우리의 한달살기 첫 숙소! 후우,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저 녀석이 겁을 집어먹고 벽을 오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이 문제는 나만이 해결할 수 있었다. 분명 긴장감이 컸는데 조금 덜했던 걸까? 안일했던 내 마음을 깨진 유리 조각이 일깨웠는지 갑자기 머리가 파바박 엄청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각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는 잔뜩 깨져 있고 그 사이에 도마뱀이 돌아다니고 신랑은 뒤에서 내 옷깃을 붙잡고 오들오들 떨며 소리지르는 상황. 불현듯 처음 집에 와서 발견했으나 안 쓸 것 같아서 치워두었던 쓰레받기와 빗자루가 떠올랐다. 후다닥 챙겨와 기회를 보던 나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찡쪽을 단번에 붙잡았다(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나는 좀 멋있었다).
너무 작아서 잡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눈앞에 안 보이니 잘 집었으리라 믿었다. 이제 남은 건 문을 열고 불청객을 내보내는 일뿐. 유리를 안 밟으려 까치발로 엉거주춤 선 신랑이 문 한쪽을 잡았고, 양손이 다 쓰레받와 빗자루에 묶인 나도 준비를 했다. 행동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덜컥, 탈탈탈, 탁! 가까이에 떨어진 찡쪽이 다시금 이쪽으로 오려 하길래 문을 쾅쾅 두드려 겁을 주니 도망갔지만, 신랑에게는 그것조차 불안 요소였다. 결국 우리는 한 시간 내내 비닐과 옷가지로 틈을 막느라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문틈은 막았지만 화장실이 걱정이었는데, 태국 여행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바퀴벌레를 검색해보니 정말 많은 분들이 고통받은 후기가 써 있었다(ㅠㅠ). 동질감을 느끼며 누군가 해결책을 써주신 분이 없을까 뒤져보니 하수구를 막는 방법을 알려주신 분이 있었다. 비닐봉지에 물을 담아 꽉 묶어서 하수구에 올려두는 것이 방법. 여기부터 우리는 이용한 모든 숙소에서 비닐봉지 방역을 철저히 했다. 정말 기나긴 하루였다.
찡쪽과 바퀴 사태를 겪고 얼마 뒤, 우리의 일상은 천천히 현지에 녹아들었다. 수영장이 있는 콘도를 온전히 누리기도 했고, 불맛을 잔뜩 낸 근처 맛집도 찾았다. 여러 번 찾아간 카페에서 우리를 알아봐줘서 수줍지만 기쁘기도 했고, 매일 땀흘리며 정원 일을 하는 에어비앤비 호스트나 노래를 자주 흥얼거리며 콘도 내부 수리를 하는 기사님을 보며 왠지 모를 정이 가기도 했다.
며칠 간 너무나 힘들어했던 신랑은 얼마 뒤 맛있게 현지식을 먹던 중 말했다. "나 내년에도 치앙마이에 다시 오고 싶어." 어머나, 신랑이 먼저 여행을 심지어 외국을 다시 오고 싶다고 말하다니! 집이 제일 안전하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다니, 게다가 바퀴와 찡쪽을 보고 힘들어한 게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나는 너무 신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왜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러자 신랑은 말했다.
그냥, 여기가 너무 좋아.
바퀴랑 찡쪽은 싫긴 한데 집안에만 안 들어오면 될 것 같고, 사람들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날씨도 좋고 너무 다 좋네.
다른 나라, 다른 도시도 좋은 곳이 많겠지만 내가 사랑한 도시를 신랑도 좋아해주니 정말 기뻤다. 게다가 우리 대왕 집돌이가 다시 오고 싶다고 할 정도의 인정을 받다니, 새삼 치앙마이가 정말 괜찮은 도시라는 느낌. 가리는 것 많은 우리 부부가 둘다 좋아하는 도시가 생긴 것도 왠지 모르게 행복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신랑에게 말했다.
그래, 우리 내년에도 또 오자. 내년에 안 되면 내후년에라도 다시 오는 것으로 해. 대신에 그때는 미리 숙소를 잡아두고 첫 2-3일은 또 호텔에서 지내자. 그동안 사람을 불러서 찡쪽과 바선생은 다 못 들어오게 하고 방역 작업을 끝내고 들어가는 걸로 하자. 만약 6개월-1년 정도로 길게 산다면 아예 집의 하수구 구멍도 제작해서 못 들어오게 하자구 :)
글쎄, 이렇게 해서라도 와야 할까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그 정도로 치앙마이가 잘 맞고 좋다. 하지만 내가 치앙마이에 오래 산다고 해서 찡쪽과 바선생에게 적응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아니,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층 더 강해졌으니까. 우리는 치앙마이에서 더 완벽한 한팀이 되었다 :)
✨본 브런치북은 신랑과 함께 하는 치앙마이 살이를 담고 있습니다. 발행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