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선배가 좋은 리더를 만든다

by 루시아 Lucia

신입사원 때, 나는 내가 혼자서도 일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실력도 있었다. 영어든, 자료 작성이든, 발표든, 법인 커뮤니케이션이든, 맡은 일은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했다.


대리, 과장급 선배들과 일하면서도 솔직히 '선배'라기보다는 '동료'라는 느낌이 더 컸다. 물론 예의 없게 군 건 아니었다. 그분들을 존중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직급은 사원이지만, 선배님들보다 역량이 부족하지는 않다. 어쩌면 내가 선배보다 더 일을 잘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생각이 완전히 달라진 날이 있다.


매년 열리는 글로벌 전략회의 자료는 수백 장에 달한다. 경영진 보고용이자 한 해 전체 방향을 결정짓는 회의라, 모든 팀원이 각자 장표를 책임지고 만든다. 그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실수하거나 속도가 늦어지면 전체 일정이 지연되는 구조다.


그날도 금요일 자정이 넘도록 다 같이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내가 여러 데이터를 종합해 만든 백데이터로 열 명 가까운 선배들이 PPT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데이터 수식 하나가 잘못 들어간 걸 발견한 것이다. 지금 고치면 전체 장표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데이터 수식을 하나 잘못 넣은 것 같습니다. 빨리 수정해서 다시 드리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선배들이 피곤한 얼굴로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무 죄송한 마음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커피를 뽑아오겠다고 말씀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불 꺼진 복도 자판기 앞에 섰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멍하기만 했다.

(260118) 본문 1.png


그때였다. 평소 사람 좋고 재밌지만, 솔직히 나보다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대리님이 나를 따라 나오셨다. 동전을 넣으며 나 대신 커피 버튼을 눌러 주셨다.


"너무 졸리지? 이렇게 피곤하면 실수 나올 수밖에 없어."


그러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있잖아, 너 지금 실수해줘서 나 솔직히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당황했다. 내가 실수해서 다행이라니.


"그렇잖아. 너 혼자 사원인데, 제일 열심히 하고 심지어 나보다 일도 더 잘하는데 멘탈까지 좋으니까 너무 완벽해 보여서 솔직히 거리감 좀 느꼈거든.


명색이 내가 선배인데 맨날 도움만 받는 것 같아서 늘 미안하기도 했는데, 오늘 네가 실수하니까 인간미도 좀 느껴지고 내가 도와줄 일이 생겨서 좋다, 야.


빈말 아니고 진짜 괜찮아. 다 완성되고 알게 됐으면 더 큰 문제지.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바로잡으면 되는 거야. 실수한 거 바로 말하는 것도 용기야. 내가 같이 해 줄게. 같이 후딱 다시하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의 뭔가가 무너지는 동시에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내가 선배를 동료처럼 대하며 일할 수 있었던 건, 선배들이 먼저 나를 동료처럼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내가 스스로 부족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었던 건, 선배님들이 나의 부족함을 이미 채워주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걸 미처 몰랐던 것이다. 선배란 이런 거구나, 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정말 힘든 상황에서도 누구를 탓하기보다 실수한 사람을 먼저 위로하고 다독일 수 있는 큰 마음을 가진 사람.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해도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하며 수많은 상황을 겪고 이겨낸 경험과, 어떤 매뉴얼에도 담겨 있지 않은 연륜과 지혜를 가진 사람. 후배를 동료로 대하면서도 문제가 생기면 기댈 수 있게 든든하게 지켜주는 사람.


그날 이후 나는 선배님들을 다른 마음으로 대하게 됐다. 함께 일하는 동료이지만, 나보다 먼저 많은 경험을 쌓은 분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자세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잘하는 일은 내 업무가 아니어도 먼저 가서 도와드렸다.


나를 후배로, 동료로 항상 따뜻하게 바라봐 주고 응원해 준 선배님들 덕분에 일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전해졌는지, 아직도 나를 "막내야~"라며 따뜻하게 불러주신다. 직장생활 초기에 그런 좋은 선배님들을 만난 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감사한 일이다.


요즘은 선배도 후배도 없이 서로를 '님'으로 부르는 회사가 많다. 권위주의와 연공서열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미 있는 변화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선후배 문화가 사라지면서 경험이 공유되지 않고, 서로가 경쟁자로만 인식되는 조직이 과연 더 좋은 조직일까.


선배는 선배답게, 후배는 후배답게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일하는 조직이 오히려 더 따뜻하고 오래 함께 갈 수 있는 조직이 아닐까.


물론 선배라는 이유로 대접만 받으려 한다면 그건 문제다. 내가 말하는 좋은 선배란 그런 사람이 아니다. 후배의 열정을 응원하고,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고, 힘든 순간에 커피 한 잔을 건넬 수 있는 사람. 그런 좋은 선배가 결국 좋은 리더가 된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그날 자판기 앞에서 받았던 위로를, 그리고 좋은 선배가 좋은 리더를 만든다는 걸 배운 그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나 또한 지금 함께 일하는 후배들에게 그런 따뜻하고 든든한, 햇살 같은 선배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260118) 본문 2.jpeg


이전 09화나쁜 리더에게도 배울 것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