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하면 헌신짝

일하는 사람에게 일이 몰리는 곳

by 아토

하루 만에 이렇게 마음이 바뀔 수가 있는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업무에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하고 있었는데, 오늘 퇴근 전 전화 한 통에 그간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차석 자리가 공석이다. 하반기 정기인사가 나기 전 개인적인 사정으로 휴직을 들어가서 약 2주간의 공백이 생겼다. 차석의 공백은 상당히 타격이 크다. 팀장님이 전면에 나서서 팀을 이끌고 앞으로 나가는 리더라면, 차석은 팀원들을 세세히 살피고 업무를 촘촘히 메우는 제2의 리더이다. 마치 각 가정의 아빠와 엄마 같은 느낌이다. 그런 자리가 공백이니 배가 앞으로 가야 하는데 자꾸만 구멍이 나는 기분이다.



그런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지난 3일간 안간힘을 썼다. 고작 3일로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사이에 2021년 1회 추경 조정안이 나왔고, 우리 팀에서 주요하게 요청했던 예산은 반영되지 않았다. 또 하반기 정기인사에 따라 올해 초 작성했던 주요 업무계획을 현행화 해야 했고, 팀에서 추진 중인 업무 중 시장님 결재를 받아야 하는 보고서가 있었다.


내가 차석 업무대행이냐고?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 나는 우리 팀에서 사석이다. 그 말은 삼석이 따로 있다는 거고, 그분이 차석의 업무를 대행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업무의 특성상 차석과 내가 하는 일이 비슷해 그 업무에 대해서는 내가 대행을 하기로 했다. 그 외의 예산 관련, 각종 자료 취합, 앞서 말한 팀을 세세히 살피는 일 등은 삼석의 역할이다.


그런데 어느새 그런 역할까지 내가 하고 있었다. 업무를 대행하다 보니 예산과 관련한 자료 취합 등의 내용을 내가 더욱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관련 민원도 결국 내가 받게 되고. 이럴 거면 삼석이 도대체 왜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앞서 말한 시장님 결재가 필요한 보고서도 삼석이 작성해야 하는 건데 팀장님께서 일주일의 시간을 줬음에도 끝끝내 아무것도 적지 못해 팀장님과 내가 야근까지 해가며 보고서 작성을 도와주었다.


어제도 1회 추경에 따른 설명자료 작성을 내가 다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내 예산과 차석 예산, 팀장님 예산과 팀 전체가 엮여있는 예산도 있는 추경안이다. 그런 추경안의 설명자료를 내가 전부 작성하고 있었다. 팀 전체가 엮여있는 예산은 차석이 했었는데 우리의 삼석은 도무지 그 업무를 파악할 생각도 마음도 의지도 없는 사람이다. 결국 그 업무가 눈에 보이는 내가 할 수밖에.


그러던 와중 오후 5시 반쯤 감사관에서 우리 팀으로 전화가 한 통 왔다. 상세한 내용은 적을 수 없으나, 차석 업무와 관련된 민원 건이었다. 차석이 없는 공백에 우왕좌왕하던 사이 그새 민원이 발생한 것이었다. 다행히 내용은 심각한 게 아니었고, 이미 파악하여 조치 중에 있던 일인데 그 사이를 못 참고 민원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감사관의 전화를 받고 조금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그간 차석의 빈자리를 메우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아등바등 아득바득 노력했는데, 결과는 감사관의 전화가 된 것 같았다.



이 상황에 더욱 화가 나고 진이 빠졌던 이유는 그 전화조차 나에게로 돌리려던 삼석의 태도였다.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감사관에서 차석 업무 관련으로 전화가 왔다고 나보고 받으라는 그 말투, 그 눈빛, 그 태도. 모르는 게 자랑인가. 본인이 모르면 본인은 아무 관련이 없는 건가.


업무를 조금 더 알고 있는 내가 조금 더 하자.
팀장님도 힘드실 텐데 내가 차석 역할을 100% 대신하지는 못하더라도
할 수 있는 부분은 나서서 하자.
다 같이 힘을 합치면 이 시기도 잘 지나갈 수 있을 거야. 2주 금방이야.


삼석의 보고서 때문에 야근하고, 추경 확보를 위해 예산팀에 혼자 뛰어가 사정하고, 차석의 민원을 대응하고, 각종 예산 관련 입력 및 보고를 하고.. 평소에 없던 긍정 에너지를 열심히 끌어와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차석의 공백 이후 매일 어렵고 힘든 일들이 있었지만, 하나씩 해결할 때 뿌듯한 마음이 있었고, 하루를 꽉 채워 열심히 일한 후 퇴근할 때 보람도 있었다. 그간 브런치에 공직의 어려움에 대해 많이 토로했지만, 최근에는 그래도 업무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씩 해결해 나가며 보람도 느꼈고, 그만큼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공직의 뿌듯함, 나름의 보람에 대해서 글을 하나 적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보람보다는 속상함이 더 힘이 센 것인지, 속상한 마음을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어 끄적이기 시작했던 글이 어느새 이만큼이다. 언젠가 다시 마음에 보람이 차오를 때 긍정적인 글을 하나 써야지. 8급이 된 지금에야 겨우 들었던 작고 소중한 마음이었는데, 이번 일을 겪으며 또다시 와르르 무너졌다. 그래도 다시 시간이 지나면 점차 회복돼겠지. 어제 그런 속상한 일을 겪고서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예능을 보며 '하하' 웃었으니 말이다.


keyword
이전 08화공시생에서 시험감독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