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자식

그런 엄마가 있었다

by 조유리

언어 연수를 준비하던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중풍으로 온몸을 못 쓰고 몇 년째 누워 계신 할머니의 병시중을 들던 할아버지. 역시나 중풍을 맞으셨고 할머니를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가족력은 위대하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엄마가 갑자기 입이 비뚤어지고 오른쪽 팔과 다리를 못 썼다. 상을 치르던 이모들이 갑자기 “어머, 얘 왜 이러니!”라고 외쳤고 엄마의 온몸을 마사지해주자 몸이 조금 풀렸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다음 날 새벽, 집에서 자던 엄마는 다시 입이 돌아갔다. 평소 자주 체해서 손가락 따는 일에 익숙했던 나는 엄마의 손발을 바늘로 따주었다. 다음날 병원에 갔고 며칠을 입원한 뒤 엄마는 점차 회복되었다.


퇴원하고 얼마 지난 어느 날 엄마는 내 방에 들어와 조용히 물었다.

연수, 안 가면 안 되니?”

이미 나는 한 학기 전체를 연수 준비로 불태웠고 학교 동기들에게 ‘내년엔 내가 없을 거야’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내 나이 스물한 살, 난생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이 1년짜리 연수라는 것에 겁이 날 법도 하건만, 나이 오십에 중풍을 맞은 엄마의 질문 안에 담긴 수많은 감정을 헤아리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너무도 들떠 있었다.

“엄마, 준비 다 해놨단 말이야.”

원망과 갈구의 눈빛을 동시에 보내는 딸을 앞에 두고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연수를 마치고 1년만에 돌아왔을 때 내 눈에는 엄청 효자가 되어있는 오빠가 눈에 띄었다. 엄마가 차를 탈 때 문도 열어주고 살갑고 부드럽게 말하는 오빠는 깐깐하고 부모에게 곧잘 말대꾸하던, 내가 알던 우리 집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가끔 내 부재가 가족에게 끼친 긍정적인 측면을 일부러 더 크게 부풀리려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책임에서 살짝 빗겨 있는 데 대한 합리화가 조금 더 쉬워졌기 때문이다.




인생의 운명 운운하며 사주를 찾아보는 것을 결혼 전에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해서였다. 사주에 운명을 맡길 것이었다면 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지도 않았다. (그때 사주를 믿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본격적으로 운세, 사주 같은 것들에 관심이 간 것은 엄마가 아프고 나서다.


엄마가 환갑의 나이에 다시 한 번 뇌경색을 맞았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그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 늘리려고 노력했던 내 모유량이 현격히 줄었다. 스트레스를 감지하는 신체의 능력은 참으로 경이롭다. 둘째의 수유는 생후 한 달 만에 분유로 완전히 전환했다.


엄마 노릇은 쉽지 않았다. 어린 첫째를 옆에 두고 이제 갓 둘째를 낳은 시점에서는 더더욱. 미혼 시절 때때로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는 가족의 모습을 책임감 회피의 구실로 삼았던 것처럼 육아 도움의 부재를 나의 어설픈 엄마 노릇에 대한 좋은 구실로 삼으려 해 봤다. 하지만 뇌에 손상을 입은 친정엄마가 걷지 못한다는 사실은 좋은 구실로만 삼기에는 좀, 큰일이었다.


다행히, 두 번째 뇌경색을 맞고 다리를 못 쓰던 엄마는 한 달 만에 두 발로 걸어서 병원을 나왔다. 그럼 그렇지, 10년 전에도 회복된 병, 시간이 흐른 만큼 의술도 발전했을 텐데 못 고칠 리가 없다며 가족들은 환호했다.

이후 전반적인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던 엄마가 그로부터 2년 후 정반대 증상인 뇌출혈이 생긴 이유를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단지, 뇌경색 치료를 위해 지속적으로 엄마가 먹던 혈전 예방약 아스피린에는 반대로 뇌출혈을 유발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책을 통해 알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약이 병을 유발했다는 확신을 갖기에는, 나는 의학을 너무 모른다.)

엄마는 언제부터인가 자주 코피를 흘렸다. 아버지는 엄마의 정기 검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 기다려보자 했다. 그 기간 동안 계단을 오르내리는 운동을 계속하던 엄마는 어느 날 계단을 오르다 뒤로 넘어져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구토를 시작했다. 응급실로 향한 엄마는 뇌출혈 진단을 받았다.

뇌를 ‘제대로’ 다친 후 엄마는 결국 정상적으로 걷지 못하게 되었다. 오른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왼발로 탁! 내딛고 오른발로 찌익~ 끌었다. 걸음 보조기는 필수였다. 말도 어눌해졌다. 다른 사람이 말을 걸지 않으면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질문에 답할 때 총기(聰氣)란 없었고 성의 없이 건성인 듯도 보였다. 왠지 모르게 멍해 보이는 엄마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다섯 살, 두 돌 아이를 키우는 때였다. 남편은 새로운 일을 찾아본다고 퇴직과 이직, 휴직을 반복했다. 친오빠네는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졌다.

나는 열성적으로 사주를 보기 시작했다. ‘카운슬러’라는 이들을 만나기도 했고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료 운세도 자주 들췄다. 모두들 내 30대는 힘든 시기라고 말했다. 내가 인생이 피는 건 50세가 넘어서라고 했다. 그런 말을 안 믿는 것보다는 믿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모든 난관이 한꺼번에 올 수는 없었다.


오직 아이 걱정만 하면 되었던 다른 전업주부들이나 부모님이 아이를 봐주어 하루 종일 나가 있을 수 있는 워킹맘들이 부러웠다. 나는 생계와, 육아와, 부모까지 모든 것이 걱정이었지만 그저 그런 때라고.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는 게 더 마음이 편한,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부모의 병세보다는 사주를 보며 신세한탄이나 하는, 그런 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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