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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Aug 13. 2024

오십될 결심

프롤로그

한 살 한 살 나이 먹는 것을 한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이 먹는 게 뭐 대수인가? 가끔 몸 상태가 안 좋아질 때도 나이 탓보다는 평소 운동량과 생활 습관을 먼저 돌아봤고 어린 후배들과 생각의 차이가 생길 때도 ‘이건 그와 나의 차이일 뿐 나이 차이는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생활한 환경에 따라 어린 사람이 더 어른스럽거나 권위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예전엔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는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즐겁기도 했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안정된 상황과 감정을 갖게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그런데 1~2년 전쯤부터 이런 마음이 달라졌다. 나는 1976년생이고 내년이면 우리나라 나이로 오십이다. (만 나이를 쓰는 것은 굳이 바뀐 제도의 도움을 빌어 어려지려 하는 것 같아 민망스럽다) 그런데, 내가 오십이 된다는 사실이 낯설고 불편하다. 내 뜻과 상관없이 먹게 되는 이 나이를 앞두고 큰 결심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다. 왜 그럴까? 오십이란, 어떤 나이길래.


전작 <그런 엄마가 있었다>에 쓴 것처럼, 나의 친정엄마는 10년간 뇌질환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고 몇 달 뒤 아버지도 갑자기 낙상하여 엄마 곁으로 갔다. 그때를 기점으로 노인 문제에 대해 나름의 탐구를 하며 지냈던 내게 50대는 노년으로 건너가는 다리와도 같이 느껴진다. 이 시기에 나이 듦과 노후에 대한 준비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60대 이후 삶이 달라질 것이므로. 그런 면에서 50대는 ‘미래’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하지만 실제 50대는 아직, ‘과거’에 단단히 묶여있다. 한때 사회에서 잘 나갔던 기억, ‘여전히 건재하다’는 자부심, 아직은 버틸만한 건강 상태, 노년 세대 중 막내가 되기보다 청년세대의 가장 연장자로서 좀 더 대접받고 싶은 심정. 지나온 시간만큼 쌓인 이 모든 과거의 잔해들은 마치 오랜 시간 들판을 걷다가 옷에 붙어버린 도꼬마리처럼 오십의 몸과 마음에 들러붙어 있다. 이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더 늙어갈 준비에 매진하기에, 50이라는 숫자는 너무 적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50대는 청년과 노년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어색한 자리바꿈을 매일 시도한다.




몇 년 전, 나보다 네 살 위 선배가 오십이 되기 전 그렇게도 고민을 많이 하고 무언가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조급해하던 모습에 ‘도대체 왜 그럴까’ 싶었다. 그런데 요즘 나의 모습이 그렇다. 과거를 잃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준비하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아주, 풀가동이다.      


공자는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했건만 이런 혼란을 생각하면 하늘의 뜻은 개뿔, 나 자신의 뜻도 모르겠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고 어떻게 늙어가고 싶은가. 그러다 보니 절실해졌다. 더 늦기 전에 나 자신을 더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나를 관통하는 다양한 단어를 떠올린다. 그중엔 한때 곁을 스쳤으나 과거에 머물러있는 것도 있고 지금의 삶까지 지배하는 것도 있다. 또 아직은 다가오지 않았지만 곧 맞이해야 할 단어도 있다. 그 어떤 것도 갑자기 내게 오지 않았듯 반짝하고 마는 불꽃놀이처럼 한순간에 사라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나를 물들였고, 물들이다가 서서히 지워질 테지. 그러기 전에 그 단어들을 잠시 손에 움켜쥐고 ‘자기 탐구 일지’를 기록하는 것으로 ‘오십될 결심’을 대신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재테크보다도, 건강정보 수집보다도 먼저 해야 할 노후준비라는 믿음이, 내 안의 저 깊은 곳에서 울컥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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