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시작해서 겨울, 해가 넘어가고 추위가 맹렬해질 때까지 몇 개월 동안, 매주 한 번씩 소파에 정좌하고 TV 모니터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열렬히 시청하던 것은 바로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이었다. 올해 세 번째 시즌을 맞은 이 방송에 열을 올린 가장 큰 이유는 49호 가수, 소수빈이 있었기 때문이다. 취향에 딱 맞는 목소리에, 좋아하는 노래,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한창 젊었을 때 들었던, 그래서 귀에 쏙쏙 꽂히는 노래들만 들고 나와 오랜 무명기간 동안 쌓아온 내공을 한껏 발산하는 매력에 매주 그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방송의 재미를 최애 가수 한 명에게서만 찾은 건 아니었다. 앨범을 낸 경험자들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 취지에 걸맞게 세대를 불문하고 다양한 참가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60이 넘은 원로 가수가 과감한 댄스를 선보이는 모습, 아이 키우며 꿈을 잊고 살았다는 주부 가수가 재도전하는 장면, 가수 얼굴은 뒤에 가려진 채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주제곡으로 잘 알려진 노래를 ‘이 곡 주인이 바로 나다’라고 외치듯 당당하게 열창하던 가수, 처음에는 무표정에 덤덤하기만 하더니 패자부활전에서는 자신도 주체 못 할 만큼 온몸을 파르르 떨며 눈물을 쏟아내던 싱어송라이터까지. 각자의 사연을 품고 가수 인생의 마지막 동아줄을 반드시 잡아내겠다는 듯 뿜어내는 열정에 나 또한 같이 호흡하고 같이 한숨 쉬며 마치 내가 그 무대에 선 듯 혼연일체가 된 나날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모든 경쟁이 끝나고 응원하던 가수 또한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얻으며 방송이 끝났건만, 이후 참여자들이 출연하는 콘텐츠나 인터뷰를 찾아보고 그들이 주인공인 콘서트도 관람하며 나의 ‘덕질’이 새로 시작되었다. 개인 유튜브 채널의 출연분까지 모두 찾아보면서 방송 후에도 한참을 <싱어게인>의 바다에서 헤맨 듯하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라는 각성이 매우 엉뚱한 순간에 찾아왔다. 경연에서 7위까지 이름을 올린 가수들이 모여 잡지 인터뷰를 하는데, “우리 중에 한 명 빼고는 모두 T예요.”라고 말한 것이다. 그들 중 유일하게 F인 가수는 다른 이들을 보며 “독한 사람들 같으니라고!”라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최근 대중적으로 회자가 되는 심리검사, MBTI의 결과를 두고 한 말이었다. F와 T는 감정형과 사고형 본성을 나누는 표시다. 감정형인 F는 타인에게 공감을 잘하고 조화를 중시하는 성향이고 T는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이성적인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MBTI 검사를 접했을 때 그저 젊은 친구들이 재미로 하는, 즉 내가 어릴 때 했던 ‘혈액형으로 성격 알아보기’와 비슷한 테스트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문적인 심리상담가가 진행하는 MBTI 검사를 해본 뒤로 그 결과를 믿게 되었다. 그때 나온 대로라면 나는 70%가 넘는 정도로 F에 해당한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긴장의 연속인 오디션의 매 라운드를 거쳐서 TOP 7까지 오른 가수들의 대부분이 T 성향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문득, ‘성공하려면 T여야 하는 건가?’라는 의문이 스쳤다. 흔히 F보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T 성향 사람들을 조롱하는 SNS 영상들도 많이 올라오는데, 사실 알고 보면 사소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흔들림 없이 실력발휘를 하기에 매우 적절한 성격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내 처지에 대한 현실적인 자각이 일어났다. 그 가수들의 절실함을 잘 이해하는 공감 능력자라는 뿌듯함과 방송이 끝나고도 그들의 지속적인 응원군이 되고 있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정작 내 일상은 도외시하고 있었던 것. 이성적으로 자기 할 일 알아서 잘하고 있는 T형 가수들을 응원한답시고 내 할 일은 뒷전인 채 덕질만 하고 있었던 ‘파워 F’인 내가 갑자기 한심해졌다.
물론 F 성향의 성공한 인물들도 많다. ‘연예인 MBTI’라고 검색을 해보면 F 성향의 유명한 인물들의 긴 이름 목록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도, 또 나처럼 일상을 제쳐두고 ‘덕질’에 빠지는 것도 한 가지 성향에 의해서 결정되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나라고 왜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굳이 성향 타령을 하면서 성공의 자질을 가늠해 보려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책 한 권을 내고 나서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에 따른 활동도 조금씩 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글쓰기가 쉽지 않다. 첫 번째 책이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을 터뜨리는 수단이었다면 앞으로의 직업적인 글쓰기는 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방향을 잡는 것부터 고민이 많다. 10년간 아팠던 엄마를 요양원에서 떠나보낸 뒤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지만 복지와 돌봄, 글쓰기를 어떻게 접목할지 아직 길을 찾는 중이다.
감사하게도,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얼마 전 글쓰기 클래스를 진행했다. ‘자기 돌봄 글쓰기’라는 주제에 끌려서 신청했다는 참가자들이 털어놓은 삶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연을 진솔하게 담은 글을 읽어보면서, 나의 MBTI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오디션-글쓰기에 있어서는 공모전이 되겠지만-의 경쟁을 뚫고 유명세를 거머쥘 정도는 아니라 해도 내가 바라는 돌봄과 글쓰기를 함께하며 아픔을 공감하고 나누는 역할을 하는데 어쩌면 나의 F적 성향이 꽤나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걸 나만의 성공이라고 부른다면, 재기를 원하는 가수의 간절함에 감정 이입하던 시간을 그리 자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성공이란 당연히 여러 모습을 띤다. MBTI 성향이 총 16가지라는데, 각자가 여기는 성공의 정의야말로 16가지보다는 더 많지 않겠는가. 심지어 중년이 된 나이에는 성공을 꿈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만 내 안의 F와 화해를 해보려 한다. TV 프로그램 하나에 혼자 빠져들고 혼자 각성하며 토라졌다가 결국 혼자 합리화하는 난리법석. 이런 변덕이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질 것 같아 걱정이다. 그 과정에서 타인과 나에게 큰 상처를 남기지 않는 정도를, 나는 이제부터 성공이라 불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