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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Aug 22. 2024

잃어버린 파리 스타일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스물두 살, 첫 해외 체류 경험이었던 1년이 내 인생에 그리도 큰 영향을 남길 줄은 그때는 몰랐다.  

    

‘유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학 때 전공이 ‘프랑스어’였다는 소리를 들으면 ‘네가?’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짧은 머리에 하이힐, 딱 붙는 바지를 입고 제법 커리어우먼인 듯 차리고 다니던 젊은 잡지 기자 시절에는 전공이 어울린다는 감탄사도 꽤나 들었건만. 아이를 낳고 살이 찌고, 재택근무를 이어가며 옷차림에도 신경을 안 쓰고 나서는 입에서 프랑스어가 나오는 것이 나조차도 어색할 정도였다. 물론 프랑스어를 말하는 사람의 외모에 대한 선입견을 갖는 것 자체가 그 언어와 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일 수 있지만, 또 막상 그 나라에 가보면 거리도 지저분하고 패션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들도 많이 눈에 띄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와 관련된 사람은 왠지 멋지고 우아해 보여야 할 것 같은 시각이 존재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원래는 과목 중에 가장 좋아했던 영어를 전공하려 했다. 그러나 원하는 대학 영어학과를 가기에 수능 점수가 충분하지 않았고 언어 외의 다른 것엔 관심도 없었기에 점수에 맞춘 다른 외국어를 골라야 했다. 고등학교에서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공부했으나 흥미가 크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와 함께 본 프랑스 영화 한 편을 기억해 냈다. <마농의 샘>. 그때 들은 프랑스어가 귀를 간질 일만큼 부드러웠던 것이 전공으로 선택한 단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다 보니 입학할 때 프랑스어의 알파벳조차도 모르는 상태였다.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를 했거나 외고에서 전공을 했던 아이들, 심지어 프랑스에서 살다 와서 원어민과 같은 실력을 뽐내는 아이들이 수두룩한 프랑스어과에서 나는 수업 시간에 입도 귀도 눈도 없는 사람 같았다. 선배들끼리 팀을 만들어 나 같은 초짜에게 기초를 알려주는 클래스가 있었지만 (그 이름이 ‘개나리반’이었던가 ‘병아리반’이었던가)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1학년 때는 물론 신입생의 여유를 즐기고 과대표도 하느라 수업을 소홀히 했었지만 좀 더 노력한 2학년 때도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프랑스 언어 연수는 ‘이러다간 졸업도 못하겠다’고 생각한 절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간절히 청했고 2학년을 마친 뒤 1년을 휴학하고 에어프랑스에 몸을 실었다. 인생 첫 해외 체류, 집을 떠난 자유에 젖을 법도 하건만 엄마가 귀한 돈으로 보내준 연수를 고마워할 줄 아는 학생이었던 나는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공부에 빠져 지냈고 3개월 만에 원어민과 큰 어려움 없이 대화할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학교라 한국인도 많았지만 외로움을 자처하며 되도록 프랑스인이나 다른 나라 학생을 만나려 노력했었다. 한국인과는 다른 그들의 사고방식 때문에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부지런히 현지인 친구들을 늘려갔다. 이런 노력 덕에 향상된 실력을 갖추고 한국으로 돌아와 남은 학년을 무사히 마쳤고 졸업한 뒤에는 첫 직장인 여행사에 합격했다. 이후 패션잡지 기자로 직종을 옮길 수 있었던 것도, 또 당시 다양한 패션 브랜드가 주최하는 해외 행사에 참여하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애티튜드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나마 1년 동안 맛본 해외 생활과 언어 실력이 큰 역할을 했다. 여러모로 언어 연수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연수 기간에 제한된 돈으로 생활을 하려다 보니 버스비를 아끼려 거리가 먼 마트까지 양손 무겁게 걸어 다니고, 어딜 가든 도시락을 싸서 다니며 외식을 한 일도 손에 꼽지만 그래도 그 1년 동안 나는 언어 외에, 많은 것을 체득했나 보다. 연수 후 집에 돌아온 뒤에도 한참 동안 프랑스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테라스 카페의 여유로운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가정집에 초대받아 맛보았던 코스형 식사가 그리워졌으며 마시는 주종은 맥주나 소주에서 와인으로 바뀌었다. 단 1년을 살고도 뇌리에 깊이 박힌 그곳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다 보면 한국에서도 어느새 프랑스식 식당에 앉아 있거나 그곳에서 봤던 스타일과 비슷한 옷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 나의 태도가 결혼 후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고 아픈 엄마를 돌보면서 거의 사라져 갔다. 때때로 가족들과 외식을 할 때 분위기를 내보려 했었고 또 종종 가까운 해외로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결혼 후에는 커리어도 패션잡지가 아닌 교육이나 육아 관련 잡지에서 이어나가면서 외국어를 쓸 일도 해외 출장을 갈 일도 거의 없었다.     


작년, 남편, 아이들과 함께 큰마음을 먹고 벼르던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파리의 에펠탑과 거리의 돌바닥, 테라스 카페에서의 여유로운 와인 한 잔의 풍경이 내 눈앞에 다시 펼쳐지다니, 믿기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유창하게 불어를 구사하던 20대의 커리어우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메뉴를 주문하며, 길을 물으며 내 입에서 프랑스어 몇 마디가 자연스레 튀어나오고, 그걸 본 아이들이 멋지다고 말해주니 ‘나 아직 죽지 않았네’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한 레스토랑에서는 식사 후 계산하고 나오려는데 웨이터가 "프랑스어를 써줘서 고마워요!"라고 인사했는데 그게 여간 뿌듯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또다시 외국어 쓸 일이 전혀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종종 그런 생각이 들긴 한다. 집 주변에서 기초 프랑스어 강좌를 시도해 볼까 하는. 가르칠 만큼 언어를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언어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명분을 만들어볼까 한다는 것. 문제는 이런 마음이 배움에 대한 열망인지 한 때 잘 나가던 젊은 시절에 대한 미련인지 헷갈린다는 것이다. ‘나도 왕년에 이런 사람이었는데...’라는 생각에 집착하며 살기는 싫다. 하지만 젊은 시절 열심히 쌓아 올린 노력의 성과를 점점 잃어간다는 사실 또한 쉽게 인정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중년 여성들이 아이들을 어느 정도 다 키우고 나면 이것저것 배우기도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며 예전 자신의 모습을 되찾고 싶어 하는 걸까? 그렇다고 온전히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 마음은 이제 이해가 될 것 같다.


잃어버린 시간은 또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는 법. 프랑스어 실력을 잃어버린 만큼 나는 아이들을 키우고 엄마를 챙기며 돌봄 노하우를 얻었고 사회복지를 공부하며 또 다른 인생의 지혜를 쌓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십을 앞두고 철없던 그때의 멋진 ‘폼’을 다시 찾고 싶어 하는 것 그 또한 인정해야 할 지금의 나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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