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날락 말락. 처음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 건 학교도 들어가기 전 대여섯 살 때였을 거다. 동대문 시장에서 의류 도매상을 하던 부모님의 1평 남짓 가게 매대 위에서 혜은이의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 3 한강교 밑을’ 노래에 맞추어 몸을 흔들었었다.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있던 도매 시장 특성상 주변이 온통 다른 가게 주인들이었고 오가는 손님들마저 쇼핑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던 것 같다. 그렇게 난 유아기 때부터 주체할 수 없는 끼를 대중 앞에 선보이는 걸 즐기는 ‘아기’였다.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장기자랑 때나 대학교 때 MT 등에서도 기회만 있으면 춤을 열심히 췄었다. 평소 수업 태도가 좋고 얌전히 공부하는 학생이었기에 내 춤을 본 친구들은 ‘어디서 그런 끼가 나오는거야?’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냐’는 등의 놀림인지 감탄인지 모를 반응을 쏟아냈다.
대학 때 프랑스 언어 연수 기간 동안 외국인 친구들과 클럽에 갈 일이 있었다. 그 시대 유행하던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듀스처럼 큰 동작으로 팔을 쭉쭉 뻗어가며 춤을 추던 나를 보고 동행했던 독일인 친구가 클럽을 나오며 물었다. “한국인들은 다 너처럼 그렇게 파워풀하게 춤을 춰?” 당시 외국에 한국인들이 많지 않았던 때라 그 클럽 내에서 한국인 대표가 된 듯한 책임감 같은 게 그 친구의 질문을 듣고 갑자기 훅 올라왔지만, 딱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진 않았다. K-POP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쯤 그 친구는 혹시, 열정적으로 춤을 춰대던 나를 기억하려나.
취업을 하고 여러 직장에 다니면서도 기회가 있으면 수시로 무대에 올랐지만 사회인으로 경험한 춤 생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살사 동호회였다. 나보다 먼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친구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그곳에 발을 들인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살사 전문 클럽에서 두어 시간 춤을 추고 나면 으레 뒤풀이로 술자리를 갖는 게 예사였는데, 어느 날 성사된 번개 모임에서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모든 이들이 다른 일이 있다며 뒤풀이를 거절했다. 나와 남편, 둘만 남긴 채. 그날 단둘이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이, 50이 된 지금까지 한집에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날이 없었다면...하고 나는 가끔 상상하긴 한다.)
결혼을 한 후에도 나의 춤 생활은 계속되었다. 물론, 아이가 금방 생겨 동호회 생활은 이어가지 못했지만 학부모들끼리 함께 놀러 가는 자리에서 여건이 맞을 때는 남편과 함께 살사를 선보이기도 했었다. 새로운 인물을 만날 때마다 나는 ‘춤 좋아하는 여자’로 각인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것도 없이 기회만 있으면 흔들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랬던 내가, 춤을 추지 않은 지 10년쯤 되었다. 엄마가 뇌질환으로 쓰러지고 오랜 시간 치매를 앓으면서 내 안의 흥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어린아이 둘을 키우고 엄마와, 엄마를 직접 돌보는 아버지를 신경쓰며 바쁜 삶을 이어간 시간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4년 전 몇 달 간격을 두고 연이어 떠났다. 요양원 부주의로 떠난 엄마 앞에 나는 몇 년간 한껏 진지해졌고 투쟁적이 되었다. 요양원을 상대로 소송을 했고 책을 써서 엄마의 사건을 세상에 알렸다. 그 시간 동안 내 인생에 춤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 사이에 아이 둘을 학부모 참여가 많은 대안형 중고등학교에 보냈는데 학교 안에서도 운동이나 취미 동호회 등 친목을 위한 모임보다는 역시나 진지하게, 사회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활동했다. 자연스레 관심이 가는 대로 참여한 것도 있지만, ‘내가 지금 그럴 상황인가’하며 유흥적인 모임은 일부러 멀리했던 터였다. 내가 쓴 책은 학교 내 몇몇 학부모들에게도 입소문이 났는데, 엄마를 가슴 아프게 보낸 내용의 글을 쓴 사람이 웃고 떠들고 춤추는 모임에 참가하는 건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이, 안 그러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내 행동반경의 경계를 긋고 있었다.
최근, 새로운 학부모 동아리가 생겼다. 춤을 추는 모임이다. 치어리딩 경험이 있는 부모가 선두에 서서 학교에서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응원의 의미를 담아 신나는 군무를 선보인다. 안무가 어찌나 파워풀한지 그걸 완수해서 무대에 올리는 중년 학부모들의 연습량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나도 그들 사이로 뛰어들어 신나게 흔들고 싶다가도 쉽게 그럴 수 없는 마음속 울타리가, 아직도 나를 가로막는다.
이제는 마음 편히 놀아도 되는 때가 되었을까? 내가 괜찮더라도, 남들이 안 좋게 보지 않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부모와의 사별을 겪은 나도 이렇게 생각이 복잡한데, 자식을 잃었거나 사회적으로 알려질 만큼 큰 사고를 당한 이들은 사건 이전의 생활을 회복하는데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리려나.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떠난 이를 생각하면 일상에서 순간순간 지어지는 미소만으로도 미안함이 밀려오지 않을까? 아픔에도 불구하고 힘내서 살아가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아픔과 상처를 더 짙게 감내해야 맞는 것일까?
마음이 끌리는 일이 있다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go!’ 할 수 있다면 좋겠건만, 나는 그런 사람도 못 되고 그런 상황도 아직은 아닌 것 같다. 하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등산이나 탁구 같은 점잖은 운동도, 악기를 연주하는 일도 아닌 춤이라니, 그런 본성적인 취향과 심정적 장막 사이의 모순을 나는 언제쯤 타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