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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Aug 30. 2024

몸에 대한 이중성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엄마, 나 아나운서 해볼까?”

“.....”

“나는 말하는 것도 좋아하고 버젓한 모습으로 남 앞에 서는 것도 좋아하고.”

“너는...”

“응?”

“못 생겨서 안 돼.”

“....”     


평소 당황하면 제대로 반박도 못하고 말문이 막혀버리는 나는 한창 진로를 고민하던 대학생 때 나눈 이 대화의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엄마 말에 동의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엄마가 딸에게 할 소린가, 싶었을 뿐.      


내 기억에 아버지와 엄마는 비교적 합리적이고 선한 분들이었지만 외모에 대해서만큼은 종종 편견적인 발언을 자주 하시는 편이었다. 살이 찐 사람들을 심하게 비난하거나 위의 대화에서처럼 ‘못 생겨서 안 돼’라는 말을 하거나. 물론 당시에는 이런 태도 또한 엄마의 ‘합리적인 면’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슴도치 엄마는커녕 딸에게마저 객관성을 잃지 않는, 그런 예리한 눈을 가진 엄마.     


하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왠지 차별적인 엄마가 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돼’ ‘성격이 다 다르듯이 외모도 다양한 거야.’라는 말을 수시로 했지만, 모르겠다. 때로 연예인의 외모에 이러쿵저러쿵한다거나 “아휴, 나 너무 살쪘어!”라고 다이어트 필요성을 언급하는 와중에 은근히 외모 차별적인 사고방식을 아이들에게 주입했을 수도.     


‘몸=외모’라는 인식밖에 없었던 젊은 시절과 달리 나이가 좀 더 들고 나서는 ‘몸’에 대해 복합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아오며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 왔는가, 무엇을, 누구와 먹으며 살아왔는가를 표현하는 것이 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예전에 직장인이었다가 요리사로 전직한 사람을 인터뷰한 기사에서 ‘요리사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직장인의 몸에서 요리사의 몸으로 바꾸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 가지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그 일을 할 수 있는 몸을 가지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이후 더더욱 사람들의 외모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뇌질환과 치매로 엄마가 오랜 시간 아팠던 것도 ‘병에 걸린 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였다. 일상 속에서 알게 모르게 아픈 사람에 대한 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 ‘암 걸리겠다’고 말하거나 기억력이 깜빡깜빡하는 사람에게 ‘치매야?’라고 말한다. 정작 그 병에 걸린 사람이 들으면 가슴에 못이 박힐 언사들이다. ‘아프면(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도 오랜 지병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못할 말이다. 흔히 과체중인 사람을 보며 건강 관리를 못 했다고 혀를 끌끌 차지만 심리적인 고통으로 인한 섭식 문제를 겪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듯 ‘사회적인 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왔고 그래서 편견도 혐오도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180° 다른 태도를 보일 때가 있는데 그건 바로 ‘내 몸’을 바라볼 때다. 나는 현재 누가 봐도 확실한 ‘50세 주부의 몸’을 가지고 있다. 어느 정도의 과체중과 근력 부족은 주로 집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가족들의 삼시세끼를 챙기고 같이 식사하는 생활이 만들어 낸 결과다. 일주일에 3일 이상 운동을 하고 식습관에도 신경을 써서 나름대로 건강하니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다. 이 몸이 다른 이의 것이었다면 나는, ‘뭐가 문제야?’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 자신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좀 더 살을 빼야 해’ ‘근육도 더 만들어야지’ ‘옷을 입으면 테가 좀 더 살아야 하지 않겠어?’ 스스로 이런 말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거울 속 몸을 향해 세모 눈을 뜨고 있다. 그건 흔히 말하는 ‘자기 객관화’도, ‘자기 관리의 채찍질’도 아니다. 타인에게는 너그럽던 눈이 혐오의 눈으로 바뀌어 자신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몇 년 전 허리를 삐끗한 뒤로는 내 몸이 더 싫어졌다. 이러다가 내 입에서 ‘아프면 죽어야지’라는 한탄이 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심하지도 않은 허리 통증을 탓하면서 말이다.   

   

원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더욱 가혹한 면이 있지만 나이 들어가며 적어도 ‘몸’에 대해서는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늙어가고 병들어갈 것이 자명한 중년의 몸에 대해 나 자신이 아니면 누가 긍정의 말을 해주겠는가. ‘자신을 사랑하라’는 모든 세대에게 필요한 말이지만 특히나 오십대 이후에는 더욱 귀한 문구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을지 모르는 외모차별적 인식이 돌고 돌아 나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리는 것 같아 두렵다. 중년의 자신감과 허세를 경계하는 건 자칫 ‘꼰대력’을 발휘하게 될 우려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지나친 겸손과 자기혐오가 바람직한 덕목일 수는 없다. 지금까지 키워 온 ‘사회적인 몸’에 대한 인식을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기를, 거울 속의 몸을 보며 애정의 눈길을 던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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