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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Aug 16. 2024

나의 이름은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름을 ‘유리’라고 소개하는 것은 다소 밍구스러운 일이다. 이름이란 그 소유자와 어울리는 느낌이 나야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편할 텐데 ‘유리’는 나와 그리 닮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세대를 이어 여자 아이돌 가수의 이름이었던 것처럼 – 쿨의 유리, 소녀시대의 유리가 있었고 최근 알게 된 아이즈원이라는 그룹의 유리라는 가수는 심지어 나와 성까지 같았다. – 이 이름에서는 귀엽고 예쁘고 발랄한 이미지가 풍긴다. 왠지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애교도 많고 항상 웃으며 다닐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외모부터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고 성격 또한 무뚝뚝하고 무심한 면이 있다. 예전부터,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먼저 접한 뒤 나를 만나면 그 괴리감에 실망해 버릴 것 같아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렇게 자꾸 불러줄 테니 이름대로 성장하라는 뜻인데 나는 내 이름의 발음이나 풍기는 이미지대로 성장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아, 물론 내가 '유리멘탈'인 것만 빼면.   


다행히, ‘유리’에 담긴 뜻은 그렇게 여성스럽지도, 애교스럽지도 않다. 보통 이런 이름은 한자 없이 한글로, 단어의 예쁜 어감을 살려 지었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나름 아버지가 많은 고민 끝에 찾아 맞춘 한자 뜻이 있다. 넉넉할 유(裕), 배 리(梨)를 써서 배나무에 열매가 많이 매달린 풍경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부모님이 생활고를 이겨보려 처절하게 노력했던 시절, 부디 배곯지 말고 넉넉한 부를 누리며 살라는 의도였다. 아버지가 기대한 것이 어느 정도의 ‘넉넉함’이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결혼 후 아이들을 키우면서 약 10여 년간 좀 팍팍한 생활을 했던 것을 빼면 어느 정도 유복한 어린 시절과 적당히 원하는 것 먹고사는 현재의 생활에 감사한다. 이렇게 사는 것에 이름 덕도 있지 않겠나, 싶다. 


하지만 어린 시절엔 상습적으로 놀림의 대상이 되는 내 이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 이름으로 놀림 한 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 내 이름은 이미 장난꾸러기들의 먹잇감이 될 준비가 되어있었다. ‘유리창’ ‘깨진 유리’ ‘방탄유리’ 등으로 불렸고 하필 그 시기에 이스라엘 출신 마술사가 내한해서 방송에서 숟가락 꺾기 등의 마술을 선보이는 바람에 그의 이름인 ‘유리겔라’라고 부르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한 번은 며칠 동안 수두를 앓고 완전히 낫지 않은 채로 학교에 갔는데 한 아이가 말했다. ‘방탄유리에 수두가 났네!’ 이제는 누군가에게 이름을 말할 때 상대방이 잘 못 알아들으면 ‘유리창 할 때 유리요’라고 부러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렇듯 노골적으로 사물과 똑같은 이름을 지은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내 이름에 일말의 호감이 생긴 것은 잠시나마 외국 생활을 하면서다. 대학교 때 외국어를 전공했고 그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1년짜리 언어연수를 떠난 것이 내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현지 학교에서 배정을 해주는 대로 하숙집에 들어갔는데 옆 방을 쓰는 친구가 일본인이었다. 그 친구와 친해져 대화를 하다가 일본에도 ‘유리’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일본어로 나리꽃 혹은 백합도 ‘유리’라고 발음된다고 했다. 러시아에도 유리라는 이름이 있고, 이미 놀림받은 경험으로 알게 된, 이스라엘 사람 이름도 유리가 있는 것을 보면 이거 참, 국제적인 이름이 아닌가! 게다가 발음도 쉬워서 굳이 본래 이름을 놔두고 영어 이름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글로벌’한 이름이라 하니 괜한 허세도 생기고 편리함도 느끼자 내 이름에 애착이 샘솟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에 따른 상처를 받았을 때도, 만족감을 느꼈을 때도 이름이라는 것에 수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히, 그걸 정한 것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생 나의 모든 삶에 함께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지만 현실적으로 개명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본인이 이름을 선택하는 것은 더 말이 안 되니 다른 방법은 없다. 가끔은 작가가 자신의 소설이나 시나리오 속 캐릭터의 성격에 맞는 이름 정하듯, 아기가 어떤 성격과 외모로 성장할지 지켜본 후 그에 맞는 이름을 정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쓸모없는 상상이다. 이름대로 살든 이름의 운명을 거스르든 삶의 시작이었던 이름은 어떻게든 인생을 견인해 간다.    




오십을 앞두고, 내 이름이 다시 민망해지려 한다. 예전에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에 가면 간호사가 ‘유리 들어오세요~’라고 말할 때가 있었다. 아이 이름보다 내 이름이 더 어린 느낌이 나서 착각한 것이었다. 때로 아이들의 친구 중에 ‘유리’라는 아이가 있으면 친구 엄마와 같은 이름인 걸 알면 좀 싫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괜한 미안함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유리’라는 이름을 들으면 당연히 젊은 여성일 것이라 예상할 것 같은데 이제 오십이 다 된 아줌마인 걸 알면 놀라지 않을까? 중년이란, 인생 모든 면에서 자신감이 떨어지는 시기인 걸까? 심지어 제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서도 말이다.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진정 마음에 안 들면 살다가 바꿀 수도 있는 이름과 달리 시간이야말로 절대 거스를 수 없음을 인정한대도 나이듦이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직도 ‘유리’라는 이름과 낯가림이 심한데, 오십이라는 나이까지 치고 들어오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50대 유리 아줌마’로 살아갈 마음의 준비가 나는 아직 덜 되어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 노년이 되면 ‘유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마음이 편해질 것도 같다. 늙으면 다시 아이로 돌아간다는 말도 있으니, ‘유리 할머니~’라고 불리는 건 좀 사랑스럽지 않을까? 그때는 그림책에 나오는 귀엽고 깜찍한 할머니처럼 작고 동그란 돋보기안경을 쓰고 흔들의자에 앉아 손뜨개질이라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때쯤에는 내가 생각하는 자신과 내 나이, 그리고 살아온 인생과 내 이름 사이의 간극이 훨씬 더 좁아져 있기를 바란다. 그때 비로소 이름에게 고백할 수 있기를. 한평생, 나와 함께 해주어 고마웠다고. 내 이름을 내가, 좋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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