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관심은 오로지 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나는 또 다른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친정엄마가 10년 동안 병을 앓고 마지막 가는 길도 편치 못했던 것, 연이어 아버지마저 떠나보낸 것으로 나는 커다란 인생의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많은 노인들에게 반복될 질병과 요양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것이 개선되어야 나 자신도 편히 늙어갈 수 있을텐데. 이런 궁금증이 나를 본격적인 사회복지 공부로 이끌었다.
사회복지 과정을 수료하려면 약 한 달간의 실습이 필수다. 복지기관에 직접 찾아가 업무를 배우고 수행하는 것인데 해당 기관에 지원해서 면접도 보고 통과되어야 할 수 있다. 다른 복지기관에 비해 주간보호센터나 요양원 등 노인을 직접 돌보는 기관들은 중년의 실습생에게 문턱이 낮은 편이다. 그런 기관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내 마음에 벽이 존재함을 느꼈다. 아픈 노인을 만나고 돌보면 엄마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았다. 그런 곳에서 일할 생각만 해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돌보던 힘든 감정, 엄마가 요양원 부주의로 떠났던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상기되었다. 노인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서 이러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침, 집과 가까운 곳에 아동양육시설이 있었다. 옛날 말로, ‘고아원’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 지역이 허허벌판이던 시절부터 그 터에 자리잡고 아이들을 돌봐왔던 곳이다. 주변 그린벨트가 차례차례 풀리면서 지금은 고층 아파트촌이 되었지만 이 시설은 넓은 전경에 건물이 아름다워서 동네와 이질감이 크지는 않다. 나는 이곳에 문을 두드려 면접을 본 뒤, 한 달 동안 실습을 했다.
실습 첫날, 기관을 찾아가며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인생을 살면서 부모없는 아이, 게다가 ‘유기된’ 아이를 만날 기회는 전혀 없었다. 그 아이들과 함께 할 만한 환경에 살아본 적이 없는 것은 내 삶이 평탄해서인가 아니면 편협해서인가. 그랬던 나의 삶의 틀을 깨러 가는 마음이 사뭇 비장했다.
해당 기관에서는 남자아이들만 돌보고 있다. 내가 보육을 돕기로 한 아이들은 2~3세 유아들. 실습에 투입된 지 단 몇 시간 만에 나의 비장함은 쓸모를 다했다.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 ‘부모없는’ ‘유기된’이라고 언어화하지 않는다면, 모두 똑같이 해맑은 아이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기관으로 들어오는 후원금이 적지 않아 아이들에게 훌륭한 교육이 제공된다는 것이었다. 뉴스에서 가끔 들은 복지기관의 학대 문제는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시설과 식사의 질이 매우 높았고 아이들은 지역 내의 좋은 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펜싱이나 체조, 음악 등을 배우는 초등 아이도 있는 것을 보고 솔직히 웬만한 형편의 가정에서 자라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시설 생활의 한계는 분명 존재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유아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보육 선생님들이 여러 명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지켜본 보육교사들은 분명 애정 넘치는 태도로 아이들을 살뜰하게 돌봤지만 6명이 3조로 교대근무를 하다보니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여러 명이 되는 상황이었다. 업무 일지도 꼼꼼히 기록되고 인수인계도 철저히 진행되었지만 사람이 달라지므로 보육 방식의 일관성이 무너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정 행동을 두고 어떤 교사는 칭찬하고 또 다른 교사는 꾸짖는 경우에 아이들이 혼란을 느끼는 경우를 자주 봤다.
실습 멘토였던 교육 팀장님은 아이들이 사춘기가 될 무렵 자신의 상황을 알게 되어 방황을 할 때가 가장 큰 고비라고 했다. 그 시기에는 너무 예민해져서, 같이 살지는 못해도 가끔 보러 오는 원가족이 있는 아이와 가족이 전혀 없는 아이들이 편을 가르고 다투기도 한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보호종료 아동이 되는 것은 또 어떻고. 기관에서 보호가 종료되는 아이들의 초기 정착을 돕기는 하지만 지속적이지는 않다. 시설을 떠난 ‘어린 성인’들은 오직 자신만이 인생의 오롯한 책임자가 된다.
한 달 동안 실습하며 묵직한 멍울이 목구멍에 걸린 느낌이 계속 들었다. 물론 어린아이들이 예쁘긴 했지만, 장난이 심하고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아이가 있으면 혼을 내야 했다. 그런데 내 아이였다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훈육도 그 아이들에게는 미안해졌다. 특히 말이 유독 느려서 행동이 앞서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살지 걱정이 앞서서 더욱 더 나쁜 버릇은 고쳐줘야지 싶고, 그러다가도 막상 혼을 내고 나면 미안함이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의 반복이었다.
이번 실습을 계기로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보호출산제’다. 출생신고도 없이 방치되는 아이를 막기 위한 것인데 산모가 가명으로 아이를 낳고 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이른바 ‘합법적인 영아 유기’는 가능해지고 아이들이 자라서 친부모를 찾을 길은 차단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유기 아동을 둘러싼 문제는 감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혀있는데 저출산 시대, 출산율만 높이려 애쓰지 말고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건강하게 성장시켜 줄 세상의 관심이 절실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실습은 끝냈지만 요즘도 나는 가끔 기관을 방문해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를 한다. 가기 전에는 마음이 먹먹했다가도 막상 가면 밝은 얼굴로 반겨주는 아이들을 보며 오히려 힘을 얻고 온다. 더 자주 가지 못하는 것이 미안할 뿐이다.
어떤 존재가 내가 사는 세상에 함께 ‘있다’는 것을 알기 전과 후는 인생의 결에 많은 차이가 난다.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과 더불어 내가 관심 가질 일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내 인생의 옆, 어딘가에 ‘있는’ 아이들을 항상 인지하는 것. 그들의 삶에 도움될 일을 하나씩 찾아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