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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Oct 16. 2024

한강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기억

가족을 통해 알게 된 어른되기 숙제

트렌드에 편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대한민국 전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를 논하는 이때, 나 또한 그녀의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채식주의자>를 읽은 것은 책이 출간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어떻게 구했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물론 그 책을 내 손으로 직접 고를 만큼 안목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은 내게 전혀 예상치 못한 깊이의 감명을 전해주었다. 사회가 상식이라고 믿는 것을 따르지 않는 이에게 세상은 얼마나 가혹한지. 타인에게 별 피해를 주지도 않는, 오직 취향과 감성에 따른 선택에 대해 사회가 부여하는 강압은 얼마나 폭력적인지. 주인공 영혜가 느낄 외로움이 절절하게 느껴져 가슴을 부여잡았다. 함께 실린 연작 ‘몽고반점’이 말하는, 세상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가적 감성은 또 얼마나 힘에 겨울 지를 생각하며 나 또한 인생에 대해 많은 사색을 했었다.    

 

당시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제 갓 태어난 첫째 아이를 돌보던 때였다. 아마도 마음 한편에 자유로운 개인이고자 하는 욕망을 덮고 ‘좋은 아내’ ‘좋은 엄마’라는 상식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는 데 대한 두려움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 책을 읽던 모습을 본 한 회사 후배가 책을 빌려가서 읽더니 돌려주면서 말했다. 

“선배, 이 책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너무 괴기하고 읽기 힘들더라고요. 어후 정말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그때 생각했다. ‘아, 맞아, 내 취향이 원래 좀 마이너 하지. 이런 책을 좋아하는 내가 이상하긴 해. 왜 나는 이런 걸 좋아할까.’ 남들은 이해 못 하는 취향을 가진 사실이 싫으면서도 그 취향 자체는 안쓰럽고 애틋했다.     

 

그 후 몇 년간 나는 둘째까지 낳으며 바쁜 워킹맘의 일상을 살았는데 당시 만나던 다른 아이 엄마들과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다. 사교육도 하지 않고 아이 용품도 물려받은 것만 쓰며 꼰대 같은 교육관을 펼쳐대는 내 모습은 학원과 갖가지 브랜드 정보를 공유하는 그들의 대화를 자연스레 거부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책장에 꽂힌 

<채식주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처음 읽은 이후로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 인기 없는 책을 볼 때마다 거울 같았다. 다른 이들과 융화되지 못하는 내 소외된 성격과 취향을 비춰주는 거울.    

잦은 이사를 할 때마다 그 책을 손에 쥐고 팔아버릴까, 망설였다. 이해받지 못하는 나 자신을 대변하는 듯한 그 책을 보면서 가슴이 뭉근히 아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리지 않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나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해 줄 것인가? 나에 대한 애정의 보루로 그 책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2016년 초, 집 정리를 하며 다시 <채식주의자>를 만지작거렸다. 잠시 망설이다 결국 결심을 했다. ‘그래, 이제 더 이상 외로움을 자처하며 살지 않을 거야. 나도 남들처럼,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속물적으로 지내면서 편안하게 살 거야.’ 나는 아이들의 연령대 지난 그림책과 함께 그 책을 중고 장터에서 팔아버렸다. 속이 다 시원했다. 소설 속 한 여성의 우울함에 공감한 내 마음이 뭐가 그리 애절하다고 이제껏 저걸 못 버리고 쥐고 있었담! 그 책을 버리면 마치 내가 엄마들 사이에서도 ‘인싸’가 되어 버릴 것만 같은 기분으로, 책을 팔면서 과거의 내 구석진 취향 또한 훌훌 날려버리는 기분으로.

  

단 몇 개월 후, 그 책은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사람들은 ‘한강이 누구야?’ ‘그렇게 대단해?’라며 서점으로 달려갔다. 나는 소식을 듣고 한 동안 멍해졌고 다른 이들처럼 서점으로 달려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라도 그랬어야 했나 싶지만 그 순간의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10년을 고민하다 간신히 내다 버린 내 감성이었다. 그 책에 공감한 나 자신을 좋아하면서 또 미워했던 10년이었다. 수많은 자기 인정과 부정을 반복한 뒤 결국은 ‘부정’을 택한 나 자신에게 깊은 실망이 밀려왔다. 결국은 인정받을 감성인데, 왜 내가 지켜주지 못했을까? 좋으면 좋은 거지, 왜 나의 취향에 세상의 잣대를 들이댔을까? 왜 그 잣대를 기준으로 내 취향을 포기하고 말았을까? 그 최종 선택에 혐오마저 일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아마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 친구 엄마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나의 소신과 신념, 그리고 어두운 곳을 바라보는 취향을 한탄해 왔다. 아이들이 어릴수록 엄마의 소외는 아이들의 소외로 이어진다. 그게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가장 아껴주어야 할 내 마음을 부정한 것이 바로 나 자신이 되었다.     


세상이 한강 작가를 인정한 뒤 나는 오히려 그를 멀리했다. 어느 날 큰마음을 먹고 다시 시도한 <희랍어 시간>의 감성도 쉽게 따라가지 못했다. 최근 아이 학교의 국어 선생님이 시대의 아픔을 다룬 책이라며 한강의 작품을 꾸준히 권할 때도, 아이가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는 것이 숙제라며 <소년이 온다>를 열독 할 때도 나는 외면했다. 혼자만의 사랑을 키우다가 혼자 그 사랑을 포기해 버린 기억은 나에게 그녀의 책을 다시 마주할 용기를 앗아가 버렸다.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책을 읽는다. 나는? 다시 그녀의 책을 손에 쥐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동안의 속앓이가 가슴 아파서도 그렇지만 원래 인기가 많으면 흥미가 떨어지는 나의 마이너 취향도 다시 발동했기 때문이다. 역시 외로움도 나를 바꾸지는 못한 것 같다. 한강 작가가 자신만의 이야기로 대중성보다 작품성을 먼저 얻어냈듯, 나 또한 이제서라도 나만의 취향을 고수하며 생긴 대로 살아보려 한다. 그러다 보면 혹시 아는가, 누구보다 먼저 ‘넥스트 한강’을 발견하고 또 혼자만의 사랑을 키워나갈지. 그런 일이 다시 와도 이젠 외로움을 이유로 내 감정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나 자신만이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음을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야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 사진 출처 : 출판사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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