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계속 행복해요
마흔일곱 살의 나에게도 엄마는 너무도 든든한 존재이다.
아이를 하나 둘 낳고 키우면서 더욱더 그렇다. 그런데 엄마는 얼마나 힘드었을까.
우리 엄마는 세 살 때 엄마를 잃고 언니랑 같이 이모집에서 자랐다고 했다.
나는 외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엄마 나이 세 살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이모할머니는 궂은일은 모두 우리 이모랑 엄마한테 시켰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밭일, 집안일 모두 맡아서 했다고 했다. 그러다 우리 이모가 엄마를 데리고 이모할머니 집에서 나와서 같이 살았다고 했다. 이모가 결혼을 하고 동생인 우리 엄마를 데리고 산거다.
그러다가 오래 데리고 살기 힘들어서 윗집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했다. 그 윗집 남자가 바로 우리 아빠다. 그때 아빠 나이 19살, 엄마 나이 18살이었다고 했다.
엄마는 나를 19살에 낳아서 키웠다고 했다.
19살 이면 지금 우리 큰 딸의 나이다. 상상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오래전 그때 이모가 너무 힘드니까
엄마를 윗집에 시집보냈고 그 어린 나이에 우리 엄마는 엄마가 되어 힘든 삶의 여정을 시작했다.
아빠도 엄마도 그 나이에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는 게 너무 어려웠던 나이였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서툴고 힘들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내가 부모가 되어본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29살에 첫째를 낳았어도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었다.
딸만 셋 낳아서 시집살이를 고되게 했던 엄마의 스토리는 내가 다 안다.
막내 동생은 나랑 7살 차이가 나고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가 동생을 얼마나 힘들게 출산했는지 그 과정도 보았고, 할머니가 또 딸이라고 나한테 성질을 부리신 것도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렇게 우리 셋을 키우며 살아오셨다. 아들이 없어서 늘 외로워하던 아빠의 온갖 투정도 다 받아내며 참고 살아오신걸 나는 안다. 엄마의 인내와 사랑으로 우리 딸 셋은 너무도 잘 자랐다.
좋은 짝꿍을 만나서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을 다 만족할 순 없지만 스스로 힘든 일 서로 잘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올해 엄마의 생신 때 우린 특별한 하루 여행을 했다.
남편들의 배려로 아이들 남편들 모두 두고 오롯이 엄마 아빠 그리고 우리 딸 셋만 여행을 했다.
아직 어린아이들도 있어서 1박 2일은 힘들었지만, 당일 여행으로 충북 제천을 여행했다.
각자 있는 곳에서 모두 열심히 살면서 하루의 여행도 충분히 힐링이 되었다.
엄마는 너무 기뻐했다. 사위들, 손자 손녀들 모두 모여 생일파티를 하는 것도 즐겁지만,
이렇게 뜻깊은 여행도 필요했던 것 같다. 아빠 엄마 나와 동생들, 그렇게 우리 가족만 함께 한 시간은
아마도 결혼 후 처음인 것 같다. 하루 여행 중에 우리들끼리만 아는 우리들 추억도 떠올리고 즐거웠다.
그리고 엄마의 진짜 생일날 아침, 우리 가족 카톡방, 엄마의 생일을 축하는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아빠가 꽃다발과 용돈을 준비해서 감동 먹었다는 엄마의 메시지가 귀엽다. 막내 동생이 꽃다발을 자랑해보라고 해서 엄마가 올렸다.
여보 당신 생일 축하합니다.
늘 웃으며 가요.
사랑합니다.
용동 봉투의 아빠의 메시지. 감동이다. 사실 아빠는 젊은 날 엄마보다 밖에 우리 가족보다 밖에서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더 잘하는 호인이셨다. 가족보다 밖에서 사회생활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고 나중에 고백하셨지만, 그땐 엄마와 우리는 참 힘들었었다. 남에게 베푸시는데 가족에겐 그렇지 못했던 아빠를 미워한 적도 있다.
지금은 너무 많이 달라지셨다. 딸들을 결혼시키고 나서 하나하나 더 노력하시고 계신 것 같다.
우리 다 시집보내 놓고 두 분이 잘 살아가시는 모습이 좋다. 무엇보다 우리 엄마, 정말 늘 저렇게 웃으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 살부터 엄마가 없었던 내 엄마. 지금까지 내 곁에 많은 걸 인내하며 늘 긍정적인 마음으로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딸들에게 사랑 표현이 서툴렀던 당신 모습을 기억해요.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엄마의 사랑은 그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