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비가 내렸습니다. 잔잔히 내렸다가 소나기가 퍼붓기도 하고 그쳤다가 다시 내립니다. 여름의 늦더위를 떼어놓으려는지 가을비가 심하게 변덕을 부렸습니다.
그래도 시원해서 좋네요.
팔월 말에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몸이 조금 상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몸에 큰 충격이 가해져서 이곳저곳 통증들이 남았습니다. 차는 폐차를 시켜야 할 정도로 망가졌지만 그에 비하면 사람은 멀쩡합니다. 트라우마가 생길까 걱정을 했는데 그것도 괜찮습니다.
사고 당일이랑 다음날까지는 계속 사고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앞 좌석에 타고 있던 저는 사고를 예감한 순간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피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체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다.
좋지 않은 일을 몇 번 겪게 되면 마음은 쉽게 체념을 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어, 내 인생도 별 수 없구나. 인생이 산만큼 높아지고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이미 누군가가 겪어 본 일입니다. 이번 차례에 저도 낚인 것이지요.
『인생은 인간의 고기 맛을 보고 그것이 아주 맛있다는 것을 알고는 지금도 한 없이 그 고기를 갈망하는 잔인한 동물이다. 그 동물은 마을과 도시에 들어가 인간을 발견할 때마다 잽싸게 낚아챈다. 인간의 살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 기행(니코스 카잔차키스)』
살아가면서 겪은 일들이란( 삶이란) 다 그런데, 세상에 더 나은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요. 누군가는 그만하면 괜찮다고 말합니다. 같이 차를 타고 있던 부모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이만하기 다행이야 라며 계속 외더군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주문을 거는 것 같았습니다.
괜찮다는 말보다도, 어떠한 일을 겪은 뒤의 가장 큰 위로는 같은 일을 겪지 않는 것입니다.
비가 또 올 것 같습니다. 비가 와도 마음이 젖지 않는다는 시를 생각했습니다. 햇살에 인생이 더 따스해질 때까지 저는 아직 더 걷고 싶습니다.
From.
『쓸쓸한 편지(정호승)』
오늘도 삶을 생각하기보다
죽음을 먼저 생각하게 될까 봐 두려워라
세상이 나를 버릴 때마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 살아온 나는
아침햇살에 내 인생이 따뜻해질 때까지
잠시 나그네 새의 집에서 잠들기로 했다
솔바람 그친 뒤에도 살아가노라면
사랑도 패배할 때가 있는 법이다
마른 잎새들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내가 울던 날
싸리나무 사이로 어리던 너의 얼굴
이제는 비가 와도 마음이 젖지 않고
인생도 깊어지면
때때로 머물 곳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