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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tagirl Jan 10. 2019

오이디푸스와 피그말리온

오이디푸스와 피그말리온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불안을 일으키는 것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은 제가 잘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일명 분석 중독이지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든, 업무에 있어서든,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잘게 쪼개어 생각하기 좋아하는 제 성향은 불확실한 것들을 확실한 것의 영역에 두어 관리하려는 강박과 궤를 같이 합니다. 그러나 문제들에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 그 이름과 개념 속에 가두어 관리하고 싶은 강박의 뿌리 깊숙이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미쳐 알지 못했습니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면 붙일수록 그 문제에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막연히 가지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이 세상 모진 운명의 대명사 중 하나인 오이디푸스. 장차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피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그 신탁을 제 발로 실현하고 마는 테베 왕자의 슬픈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오이디푸스 비극에 대한 해설 가운데, 전혀 색다른 해석을 읽고 무릎을 친 적이 있는데, 그 해석의 주인공은 심리학자 황상민입니다. 그는 오이디푸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아버지를 죽일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벌어진 걸까? 그렇지 않다. 그의 비극은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던 데 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은 우리가 그것을 믿는 순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다가온다. (황상민, 독립연습, 생각연구소, 2012)


프로이트는 모두에게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의 덕분에 우리는 몸이 다치듯이 마음이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하지만 황박사는 이로 인해 우리가 현재의 고통을 오직 과거의 프레임으로만 보는 덫, 즉 '트라우마'라 불리는 과거의 덫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마치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운명을 피하려고 할수록 역설적으로 운명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트라우마라는 것을 문제 삼으면 삼을수록 그것에서 절대 멀어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덧붙입니다. 미신은 믿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만 믿는 순간 불행이 비로소 시작된다고, 그러니 제 아무리 대단한 경험도 기억창고에 넣어두고 쓰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스윙 분석기 같은 첨단 장비나, 동영상 촬영이 가능한 스마트폰, 유튜브 같은 동영상 아카이브 덕에 우리는 우리의 스윙을 다 저장하고 비교하고 그것들을 백분의 일초 단위로 쪼개 볼 수 있는 무기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것은 스윙을 과거의 프레임으로만 보게 하는 덫에 우리를 빠뜨려서 오히려 우리를 문제에 꽁꽁 묶어둘 수도 있다고. 하지만 제 아무리 대단한 문제라도 기억창고에 넣어두고 쓰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네요. 나의 고유한 문제라고 따로 챙겨서 창고에 두고 자꾸자꾸 들여다보는 행위는 의도치 않게 피그말리온 효과를 불러올 수 있고, 어느샌가 자기 충족적 예언으로 나를 그 문제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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