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코스는 티잉 그라운드 teeing ground와 페어웨이 fairway, 그린 green 외에도 해저드 hazard로 구성됩니다. 골프 코스를 디자인할 때 이들을 적재적소에 자리 잡게 하는 것이 코스의 난이도와 재미 등을 결정하지요. 공이 해저드를 거치지 않고 티잉 그라운드에서 시작해 페어웨이를 지나 그린 위에 안착하는 것은 모든 골퍼의 로망이겠지만, 세계 랭킹 수위를 다투는 선수들의 공들조차 여지없이 해저드에 빠집니다. 덕분에 그 장면을 목격하는 많은 아마추어 골퍼들에게 의도치 않게 안도감을 선사하기도 하지요. 저렇게 대단한 선수들도 저러는데, 나도 괜찮은 거구나.
해저드는 골프 게임을 어렵게도 하고 재미있게도 하는 일종의 장애물입니다. 해저드에는 호수나 바다, 강 같은 '워터 해저드 water hazard'도 있고 우리가 잘 아는 '벙커 bunker'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워터 해저드에는 물귀신이라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워터 해저드를 지나가는 공을 치면 가로지르려 했든 피해 가려 했든 관계없이 공이 꼭 물속으로 쑥 빠져버립니다. 벙커에는 정말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살고 있는 것일까요? 잘 지나가는 공을 무언가가 모래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내 이전에도 이미 누군가가 수장시킨 워터 해저드 속 수많은 공들을 보고 있노라면, 혹은 이미 누군가 여럿이 다녀간듯한 벙커에서 또다시 벙커로 들어가는 공, 일명 B2B 샷으로 신발 속이 모래투성이가 될 때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해저드는 무엇인가요?
도넛의 구멍을 공백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존재로 받아들이느냐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인 문제고, 그 때문에 도넛의 맛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양을 쫒는 모험, 문학사상, 2009)
도넛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이 있습니다만, 가운데 구멍을 만듦으로써 안쪽 반죽이 더 잘 익게 된다는 사실의 우연한 발견만큼은 모든 설設에 공통입니다. 역시 도넛을 여타 빵들과 구별시키는 핵심이 바로 도넛의 구멍이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하루키가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도넛에 있어 도넛의 구멍은 공백인가요, 아니면 존재인가요? 여기서 이 질문을 골프코스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해저드는 공백인가요 아니면 존재인가요? 해저드는 내 공이 그려야 하는 궤도에서 부재하는, 내가 깨물 수 없는 그리고 깨물지 말아야 할 구멍인가요? 아니면 내 혀가 닿을 수도 있는, 내가 그리는 궤도 위의 '존재'인가요? 이에 대한 답변이 무엇이든, 도넛을 먹으면서 그 구멍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이 없듯 해저드에 마음의 눈길도 주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요?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본능은 주문의 방향성을 인식할 수 없기에 '해저드를 의식하지 마'라는 주문은 결국 '해저드'라는 명령어로 입력된다고요. 그래서인가요. 해저드를 의식하지 말고 치자는 스스로에 대한 주문은 결국 해저드를 더욱더 강렬히 의식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공은 해저드까지 친절하게 안내됩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제가 읊는 주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해저드를 의식하지 말기를 의식하지 말기를 의식하지 말기를.... (무한반복)."
그래도 제 본능은 이렇게 입력하는 것만 같네요. "해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