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좋다.
첫날보다는 뒤숭숭함이 적어진 두 번째 밤을 지냈다. 아침은 라면을 끓여 먹었다. 물가에는 밤을 새워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어제 사 두었던 부산우유를 딸기우유의 답례로 건넸다. 부곡까지의 길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걷기에 좋을 것이라며 추천했다. 강을 가로지르는 본포교를 지나 오른쪽에는 녹색의 산자락을 왼쪽에는 낙동강을 두고 청학로를 걸었다. 역시 들은 대로 낙동강변을 끼고 걷는 경치는 일품이었다.
길은 강물의 속도와 곡선의 변화에 따라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고 높이를 맞추는 듯하다가 오르막에서는 다시 발아래로 멀찍이 밀어내며 입체적 거리 두기를 반복하였다. 마치 두 개의 악기가 하나의 악보 안에서 빠르기와 강약과 호흡을 조절하며 긴장과 이완을 통해 관객을 이끌듯이, 길은 단조로운 풍경 안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며 풍부한 시각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노력하였다.
날씨가 흐려 뜨거운 햇빛은 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30도가 넘는 더위는 몸을 지치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런데 물이 바닥을 드러냈다. 배까지 고파오기 시작했다. 식당이나 상점은 당분간 안 계실 태세가 확실하다.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간 그 옹달샘나 세수는 물론 족욕을 한 물이라도 괜찮다. 얼마를 더 가야 할까. 아름다웠던 길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빨리 이러한 환경에서 탈출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내가 '호그와트' 학생이 되어야 한다.
한참을 걸었다. 산의 경사로가 조금씩 완만해지고 있었다. 도로변에 감나무를 가꾸고 있는 조그만 비탈밭이 보였다. 밭의 중간쯤에 도로와 연결된 좁은 오르막이 있었고 컨테이너 박스 주택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이 보였다. 드디어 '9와 4분의 3승강장'을 찾은 것이다. 노인 한 분이 용접을 하고 있었다. 지하수를 물통에 가득 담았다. 내친김에 밥을 좀 먹겠다고 말하니 평상에서 편히 먹으라고 한다. 작은 화단 크기의 밭에서 고추와 깻잎도 따다 먹으라고 했다. 사양하고 물을 끓여 건조식품을 데워 먹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지 물어보았다. 노인의 고향은 부산이고 요양차 이곳에서 머문다고 했다. 큰 수술을 두 번 받았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끄덕였다.
사람은 아프면 먼저 엄마를 찾고 그래도 아프면 병원에 가고 그래도 안될 때에는 자연의 품을 찾는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나이가 들면 자연과 가까워지려 하거나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려고 한다. 인간 진화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자연환경의 변화에 비해 극히 짧다. 사실 그냥 짧다는 표현도 부적절하다. 그 부적절한 표현의 시간 안에서 인간은 너무도 영리해서 자연과의 이혼절차를 갈수록 신속하고 편리하게 마무리하도록 기술 문명의 시스템을 만들어 보였다. 루시 이후 350만 년 중에 불과 200년도 안 되는 부적절한 표현의 짧은 시간에 말이다. 죽음이 자연으로의 영원한 복귀로 보상을 주는 것인지는 모른다. 나이가 든다고 모두 자연과 화해를 신청하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부적절해 보일 만큼 빠른 시간으로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있다. 노인께 건강하시라 인사를 드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부곡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중간 점검차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나 물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이 길이 부곡 가는 길 맞나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분명히 정중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잊지 않고 품격 있게 말하려 노력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지나온 길을 가리키며 버스 정류장을 알려준다. 걸어서 갈 거라고 말했다.
"게가 어데라고 걸어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며 따지듯 말한다.
"예?"
화에 가까운 핀잔이 예고 없이 벌컥 들어오는 바람에 두 눈의 쌍꺼풀이 깊어졌다.
"씰데 없는 짓 하지 말고 차 타고 가!"
순간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분위기가 아니다 싶어 슬그머니 자리를 빼고 돌아서 몇 걸음을 띄기도 전에 또다시 뒤통수에 소리가 꽂힌다. "게가 어덴데... 차를 타고 가야..어쩌구 저쩌구... 구시렁. 구시렁." 소리가 멀어진다. 내가 뭘 잘 못했나? 뒤통수를 만져보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보았던 머리통만 한 땀방울이 만져진다. 화가 많이 나셨나? 그래도 난 잘못 없다.
이제는 멀리 사라진 옛 영광의 발자취도 찾기 어려운 부곡온천. 그래도 온천인데 달라도 다르겠지 하는 생각에 사우나를 찾았다. 매표소에 짐을 맡기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짐을 맡아주던 중년 남자가 따라 나온다. 그리고 말을 붙인다. 처음 보는 사람과 나눌 법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서는데 남자가 아쉬웠는지 따라나서며 말을 붙인다. 하루에 얼마나 걷는지 묻는다. 모른다. 측정해보지 않았으니까. 국지성 소나기를 조심하며 더위에 물을 많이 마시라고 조언까지 해준다. 고마웠다.
작은 공원 안에 야영할 장소는 그런대로 있어 보인다. 적당한 자리를 찾으려 돌아다녔다. 다리는 무겁고 움직임이 확연히 느려졌다. 연장 후반의 추가시간을 뛰는 축구선수처럼. 육체는 나의 지친 모습을 세밀화를 보듯 직접 느끼게 해 준다. 그래도 잠자리는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쉬익~! 음향 효과와 함께 눈으로 줌인되는 장소. 육각정! 기와지붕과 지면과 분리된 나무로 만든 바닥이 있는 그곳. 그 옛날 선비들이나 머물던 팔각정보다 그 내각의 합이 360도 작은 720도의 이상적인 잠자리.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이제 저녁을 먹기만 하면 된다. 식당 아주머니는 내게 온천욕을 했는지 묻는다. 그렇다고 답했다. 다시 묻는다. 내 말이 안 들리나? 좀 더 크고 정확히 대답했다. 궁금한 건지 할 말이 있는 건지 알듯 말 듯 자꾸 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혹시 초등학교 동창이나 먼 친척? 그도 아니면 분명 나의 외모나 여행자의 아우라를 보고 반해버린 게 분명하다. 이런 외모 지상 주의자 같으니라고. 시선을 피하고 싶다. "모자 좀 쓰지. 얼굴이 너무 까매~" 그제서야 왜 자꾸 물었는지 이제 알겠다. 이젠 거울이 보고 싶다. 동태 찌개를 먹고 있는데 돼지고기 볶음을 한 접시 내어준다. 내게 반한 것이 분명하다.
몸은 피곤 하지만 배도 부르고 여유로운 나는 시원한 캔맥주로 시간을 느리게 만들었다. 공원의 야간 조명도 더욱 돋보이는 밤. 산책을 나온 가족. 젊은 청춘들... 술에 취한 중년의 남녀...
모두가 나만큼 여유롭다.
아~ 사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