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소는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멀리 부산항이 보인다. 5시 40분. 흥분과 기대감은 당연히 없다. 어떤 의지만 결연하다. 아직 부두가 멀어 보이지만 미리 준비를 하고 나왔다. 항만 주변 거리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한산하다. 어디로 가지? 나에게 물어본다. '그걸 왜 나한테..' 내가 회피하듯 대답한다. 혹시나 해서 정해놓은 게 있는지. '그런 건 네가 하는 거 아냐?' 그런가. 몇 마디 주고받고는 생각해 본다. 참고로 나는 당황스러울 때나 불안정한 정서일 때 내게 말을 한다. 어떤 말이든 상황에 따라 비난이든 칭찬이든 쏟아붓는다. 책임을 회피할 때나 스스로와 타협하고 합리화할 때도 나는 나를 아주 유용하게 이용한다.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목적지는 서울이고 그렇다면 방향은 북쪽이다. 부산역으로 가자. 지하철 노선을 보고 참고도 하고 역내 서점도 있으니 필요한 지도를 살 수도 있다. 서점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럼 일단 밥부터 먹자. 역 주변을 서성이다 국밥집을 발견했다. 부산은 돼지국밥이지. 아니지. 돼지국밥은 부산이지. 옆자리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네 명이 있다. 자전거 여행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찬을 내어 주시는 분과 눈이 마주쳤다.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미소가 마음에 든다. 부드러운 건 이런 거야 라고 얼굴 표정에서 개념을 정의할 수 있는 미소다. 미소라는 단어가 주는 가벼움도 실크처럼 관능적인 부드러움도 아니다. 입술보다는 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미소를 지을 때 작은 눈주름들이 보이지 않게 오므라들며 칠십여 년의 세월이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푸근함이 있다. 국밥을 다 먹고 자리를 떠날 때도 부드러운 미소를 건네는 그녀 덕분에 아침의 긴장이 풀리고 다소 여유로워진다.
오래된 미소는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북으로 가자. 월북은 아니다. 북쪽을 보니 구봉산이 보이고 산자락에 부산 고등학교가 있다. 길을 물어 산을 넘어가기로 했다. 숲길을 오를수록 배낭의 무게가 중력과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며 무릎의 수직 상승을 방해한다. 하지만 주변의 경치는 약물보다 강력하게 스테로이드를 생산해내고 보폭을 진자운동처럼 진행시키며 근육의 피로를 견디게 해 준다. 갈림길에서 서성이다 산책나온 노인께 길을 물었다. 노인은 나뭇가지를 들었다. 마른땅에 소나무 가지가 지나가자 마치 표면이 갈라지며 수분을 간직한 황갈색의 흙이 들어난다. 선들이 이어지며 그림처럼 간결한 지도가 나타난다. 산을 넘으면 꽃마을이 있다고 한다.
돌고 돌아 낙동강에 다다랐다. 강바람을 맞으며 다정하게 앉아있는 노인 두 분께 길을 물었다. 두 분의 의견이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정 반대의 방향을 가르쳐 주었으니 말이다. 서로가 맞다고 옥신각신 몇 마디 주장하는가 싶더니 언성이 높아진다. 나는 그냥 서 있었다. 나는 잠시 곁에서 머뭇거리다 인사도 하지 못하고 가던 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얼마쯤 가다가 다시 길을 물었다.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 자연스럽게 내적 평화가 깨지고 요동치기 시작한다. 발에 열이 나고 종아리는 통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김해와 진영을 구분해서 물었어야 했다. 그때그때 목적지를 달리해 물었기 때문이다. 김해는 쭈욱 가고 진영은 돌아가야 빠르다는 것이다. 되돌아 가지는 않는다. 괜찮다. 어디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되니까.
낙동강을 건너 부산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돌다리도 두드리라는 격언처럼 열심히 묻고 또 물으며 걸었는데 그만 너무 두드리면 돌다리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본래 소심하고 신중한 편이라 생각했는데 - 내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우유부단하다고 한다.- 강점이 지나쳐 약점이 돼버린 경우다.
구포역에 도착해 크게 영역 표시를 했다. 동물임을 확인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밀면집에 들어갔다. 다른 손님은 없었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운영하고 있었다. 남자는 파리채를 들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다.
주문을 하고 길을 물었다. 남자는 마침내, 드디어, 진정,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고 결심을 한 듯, 짧은 들숨과 함께 커다란 지도를 꺼내 식탁 위에 펼쳐놓는다. 들고 있던 파리채는 지휘봉으로 변했다. 군의 야전 사령관처럼 절도 있고 단호하며 자기 확신에 찬 모습으로 지도에 공격 지점과 최종 방어선을 설명을 하고 있는데... "아저씨 무 좀 썰어요!" 마땅치 않은 핀잔의 창을 앞세운 주어와 술어들이 명령의 갑옷을 입고 차례대로 사령관의 성에 무혈입성한다. 이 시점에 사령관은 바로 퇴임. 무를 썬다. 그래도 그 열정이 감사하다.
김해 도착. 종아리가 부어오르고 통증이 심해진다. 얼음찜질을 하면 좋겠다. 얼음. 햄버거 체인점이 눈에 보인다. 그곳에는 얼음이 든 음료수를 판다. 햄버거를 하나 먹고 난 뒤 잠깐 망설이다가 순박해 보이는, 주문대 앞에 서있는 아가씨의 얼굴을 믿고 용기를 냈다. '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지만 지금은 당신의 도움이 절실한 순간이며 기회가 왔을 때 망설이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도록 말해야 했다.
"저기 그... 얼음을 좀"
아. 망했다.
아가씨가 밝게 웃으며 묻는다.
"네?"
"얼음 좀.. 종아리가 그러니까"
진짜 망했다.
"얼음요?" 계속 웃는다.
"네. 저기 비닐봉다리에.. 찜질할 거라서요. 종아리."
어눌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가씨가 더 밝은 모습으로 투명 비닐팩을 들어 입구를 벌리며 보여준다.
"이거면 될까요?"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다. 정말 고마웠어요 숙녀님.
김해 한림면 신천리에 도착했다. 더 이상 무릎이 올라가지 않는다. 저녁때지만 아직 해가 남아있다. 서둘러 야영할 자리를 찾아야 한다. 신천 초등학교도 보인다. 장소를 물색하려 조금 내려가다 보니 이팝나무가 정자를 이루는 명당을 찾았다. 바닥은 시멘트로 포장을 했다. 바닥이 평탄한 것이 숙면을 위한 최우선의 조건이다. 적당히 주변을 둘러보며 텐트를 조립하고 무거운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담배를 깊게 빨아 넘기자 알 수 없는 안도와 해방감이 전신으로 퍼진다.
"야영할라꼬 하능교?"
할아버지 한분이 다가오신다. 논에 물을 보고 오시는 길이라고 한다. 인사차 몇 마디 주고받다 보니 귀가 어두우시다.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합천 방향으로 갈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는 해인사로 시작해 중국 불교의 1대 조사 달마와 6조 혜능의 일화까지 설명한다. 많은 한자 게송과 뜻풀이는 보충 수업으로 불교에 대한 특별 강의가 이어졌다. 그런데 정작 당신은 불교인이 아니고 전통 유교 교육을 배웠다고 하신다. 한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다. 할아버지는 낮고 느리게 차분히 말씀을 하셨고 나는 목에 핏대를 올리고 고함을 치듯 소리를 질러가며 말했다.
옆에 놓아둔 담배가 계속 맘에 걸려 슬그머니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무릎을 구부려 단정하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몸 둘 바를 몰랐다. 결국 한 시간 동안 나는 할아버지 앞에서 두 다리 쭉 펴고 고함을 지른 천하의 싸가지 없는 자식이 되어버렸다.
막걸리 한 병. 담배 두 모금.
할아버지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