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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부 Sep 08. 2019

함박 웃음을 짓다

오늘의 일기 '무탈한 하루를 기대하며'

뉴스에서는 태풍 '링링'의 이동 경로와 현재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하고 있다.

상당히 강한 태풍이라 모두가 긴장하고 있지만 아직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바람 많은 늦여름 날씨이다.

순간 순간 불어오는 바람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진다.


토요일 아침, 눈을 일찍 떴다.

한 주간의 피로때문에 몸을 일으키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제 자정까지 보았던 법무장관 후보자 청문회의 숙취가 아침까지 남아 있었다.

언제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고...

참 세상 모를 일이다.


숙취는 어쩌면 어제 TV를 보며 마신 맥주 탓인지도 모르지만,

찝찝한 이 기분은 청문회때문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기분 나쁜 숙취를 이기려면 빨리 잠에서 깨는 수 밖에 없다.

아니면 더 자야 하는데, 오전 일정 때문에 더 잘 수는 없다.


'빨리 몸을 일으켜야 한다' 생각했다.

누운 상태로 오른 다리를 살짝 들어 빨리 내리면 반동이 생긴다.

그러면 상체를 쉽게 일으킬 수 있다.


옆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7:30분


전화기를 내려 놓고, 오른다리를 들어 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가뿐하게 몸이 일어났다.

그리 나쁠 것 같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다.


나쁘지 않은 하루면 된다.

날아갈 듯 멋진 하루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실 그런 멋진 하루도 좋겠지만 난 그냥 무탈한 하루면 충분하다.


아침 피곤한 눈을 떠 하루를 살고,

저녁 피곤한 눈을 감으면 피로가 수면제가 되어 잠이 든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다시 아침이 된다.

무리한 것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오늘 난 그런 무탈한 하루를 기대해 본다.


오른다리의 반동으로 시작한 나의 하루는 아직까지 나쁘지 않다.

'아직까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일어난지 고작 2분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빤수와 난닝구차림으로 거울 앞에 서서 이를 닦았다.

어제밤 샤워를 하고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았다.

덕분에 머리는 웃음이 나올만큼 충분히 뻗쳐 있었다.

뻗친 머리를 손바닥으로 살짝 건드려 보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안경을 벗어 옆어 두고 세수를 하고 얼굴에 물기를 닦아내었다.

다시 안경을 썼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거울을 자주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구석 하나 마음에 드는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이게 '나'이기에 성형을 하지 않는 이상, 이 얼굴로 살아야 한다.

성형은 많이 아플것 같아 그냥 이 얼굴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나'이기에,

내가 받아 들이지 않으면 누가 '나'를 받아 들일 수 있을까?

거울속의 '나'에게 "오늘도 잘 부탁한다'라고 나즈막히 인사를 했다.


거울을 보지 않으면, 난 착각한다.

아주 멋진 사람인 줄 착각한다.

그래서 거울을 본다.

좌절한다.

그래도 거울을 본다.

내가 누구인지, 잘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모른다.

어느 시인의 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가 내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니 말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싯구를 읖조려 보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나와 보니, 아내는 벌써 화장대에 앉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와이프를 보면서 다시 주문을 외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아내는 내가 무얼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멍하게 주문을 외고 있는 나를 보며 아내는 말했다.

"뭐해?"

"이뻐서"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피식 웃으면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전지전능하다!

모든걸 다 알고 있다!


도망치듯 주섬 주섬 옷가지를 주워 입고 주방으로 나왔다.

커피를 갈고, 커피에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렸다.

삶은 계란 하나와 삶은 소세지 두개 그리고 에어프라이어에 구운? 튀긴? 옥수수를 반으로 갈랐다.

뜨거운 옥수수를 맨 손으로 반으로 가르면 뜨거워 꽉 쥘 수 없다.

그래서 항상 얇은 끄트머리쪽이 작게 갈라진다.


큰 쪽은 내가 먹고 작은 쪽은 아내에게 주었다.

전지전능한 아내는 알고 있을까? 일종의 테스트였다. 아내는 그냥 넘어갔다. 역시 자비롭다.


어쨌든 평소같았으면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겠지만,

'링링'이 때문에 네비게이션으로 확인한 도로는 한산했다.

시간이 여유로웠다.


삶은 계란은 이미 다 먹었고, 소세지 하나는 옥수수와 함께 먹었다.

하나 남은 소세지는 옥수수를 먹으며 땡길 때 먹으려고 남겨 두었다.

이제 막 일어난 작은 딸이 아껴둔 소세지를 낼름 먹어 버렸다.

얄미웠다.


'다음엔 소세지부터 먼저 먹어야지' 다짐하며 남은 옥수수를 우걱우걱 씹었다.

목이 메어 커피를 마시고 나머지 옥수수 알갱이들을 헤치웠다.

이제 출근할 시간이 되었다.


사실 오늘은 쉬는 날이지만, 문제 출제 때문에 학교에 가야 했다.

아내는 토요일이지만 수업이 있어 학교에 가야해서 우리는 같이 학교로 갔다.


아내는 내가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아내는 자신이 운전하는 것을 싫어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아내는 내 운전 스타일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아내는 내가 조용히 그리고 편안하게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서울에서 운전하는데 조용히 그리고 편안하게 운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예수나 석가모니가 운전하다 창문을 내리고 화를 내며 쌍욕하는 것을 본다해도 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아내는 내 운전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지만 언제나 나에게 운전을 맡긴다.

그런걸 보면 아내는 참 운전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난 가급적이면 아내와 함께 출근하고 퇴근한다.


학교로 가는 고속도로는 상당히 한산했다.

용인집에서 방배동까지 35분!

이건 말도 안되는 시간이다.

이기적이긴 하지만 '링링'이에게 고마웠다.


여유를 부리면서 출발했는데도 10분이나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길가에서 아주 오랜만에 친한 동생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둥, 너무 이쁘다는 둥,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둥...

참 반가운 인사였다.


주차를 하고 나는 문제를 내러 가고 아내는 수업을 하러 갔다.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아내가 있는 레슨실로 갔다.

"어떻게 하지?" 아내에게 물었다.

"먼저 가, 나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아내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먼저 간다." 자동차 열쇠를 아내에게 건네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집으로 가려면 방배에서 강남까지 지하철을 타고, 강남에서 집까지 광역버스를 타고 온다.

지하철역 공기는 태풍때문인지 후덥지근했다.

그리고 방배역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태풍 때문인 듯 했다.


지하철도어 맨 앞에 서 있었지만, 열린 지하철 안은 이미 만원이었다.

아무도 내리지 않아 탈 곳이 없었다.


옆칸으로 걸어갔다.

그 칸도 발 디딜틈 없이 만원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하철도어가 언제 닫힐지 모른다.

그래서 다시 옆칸으로 갈 땐 뛰어서 갔다.

간신히 설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보였다.

지하철에 오르니 이내 문이 닫혔다.


손 둘 곳도 없었지만 그래도 탔으니 다행이다.

지하철문 창문 테두리 까만 고무라도 잡고나니 뒤로 넘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만원 지하철의 공기는 눅눅하고 칙칙했다.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나의 숨과 체취도 그 눅눅하고 칙칙함에 일조를 하고 있다 생각하니 불쾌함은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열차는 방배에서 서초로, 서초를 지나 교대로 가고 있었다.

친한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까 같이 문제를 출제하고 있었던 동생이다.


"형, 어디에요?"

"나, 집에 갈려고 지하철 타고 가고 있지?"

"차 안가지고 왔어요?"

"가지고 왔지. 형미 올 때 타고 오라고 열쇠 주고 왔다."

"아.. 멀리갔어요?"

"아니, 조금 있으면 교대"

"형, 밥이나 같이 안 먹을래요?"

"좋아, 밥 먹자"


전화를 끊고 교대에서 내려 개찰구를 나와 반대편으로 다시 내려갔다.

교대에서 방배로 가는 지하철은 한산했다.

지하철을 타 읽고 있던 책을 다시 꺼내었다.

두 세줄 읽고 나니 금방 방배에 도착했다.


어디냐 전화를 하려고 전화기를 꺼내는데, 저기서 그 친구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기특했다.

우리는 김치찌게를 먹기로 했다.


방배역 근처 김치찌게집은 좁은 도로를 끼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맛있게 하는 김치찌게집이 쉬는 날이라 어쩔수 없이 건너편 프렌차이즈 김치찌게집으로 갔다.


김치찌게가 끓는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제 누가, 누구를 만나 사당동에서 술을 마시다 거나하게 취해 전화를 했던 이야기와 주로 마시는 술로 막걸리가 좋은지 맥주가 좋은지 등의 이야기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는 지인들의 근황을 물으니 김치찌게 국물이 맛있게 끓고 있었다.


진한 김치찌게 국물 한 숫가락 퍼서 먹었다.

매콤 짭짤한 김치찌게 국물은 속도 마음도 풀어 주었다.

잘 익은 돼지 목살은 가위로 잘게 썰었다.

당연히 라면사리는 추가로 넣었다.

환상의 조합이다.


밥 한 그릇 비우고 찌게국물 한 사발 들이켰다.

캬~ 소리가 절로 나왔다.


동생이 밥갑을 계산했고 나는 대신 커피를 사기로 했다.

카페로 가고 있는데 콧물이 나왔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알레르기성 비염이다.


내 알레르기성 비염에는 저렴한 엑티피드가 직방이다.

문제는 엑티피드의 부작용인데 몸이 아주 아주 나른해진다는 것이다.

자기 전에 먹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이렇게 콧물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약을 먹어야 한다.

약국에 들러 엑티피드를 사서 입에 넣었다.

약효는 부작용과 함께 금방 나타났다.


커피를 마시는 내내 기분좋은 나른함이 몰려왔다.

카페의 소파는 편안했다.

이제 잠만 자면 된다.

그리고 창 밖의 풍경은 태풍소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하기만 했다.


커피 한 모금 다시 마셨다.

가로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사 바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비가 한 두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남의 일인냥 바깥 풍경을 몽롱하게 쳐다 보았다.


앗!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비가 더 많이 오기 전에 가야 한다.

집으로 든, 아내에게로든 말이다.


동생과 난 카페를 나와 비를 맞으며 걷다 헤어졌다.

나는 아내가 있는 레슨실로 갔다.

아내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학생은 열창을 하고 있었다.


작은 창 넘어로 자세히 보았다. 오래 보았다.

창 넘어 기웃거리는 나를 발견한 아내는 살짝 놀란 듯 했다.


자동차 열쇠를 받아 들고 차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가볍게 툭 툭 떨어지던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운동할때만 뛰자’가 내 인생 철학이라 왠만하면 자동차까지 걸어가려 했으나 이런 빗속에서는 무리였다.


뛰었다.

쏟아지는 빗속을 뛰고 있으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어릴적 비가 오면 골목을 그렇게 뛰어 다녔다.

포장도 되어있지 않은 길을 흙탕물 튕기며 뛰어 다녔다.

미친놈은 아니지만 비 맞으며 뛰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큰 딸이 떠나기 전 같이 달리기를 했다.

어느 하루 같이 뛰고 있는데 소나기가 내렸다.

큰 딸과 같이 비 맞으면서 뛰고 싶었었는데 그날은 소원성취하는 날이었다.

큰 딸이 생각났다.


머리도 옷도 젖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자동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자동차 안 공기는 눅눅했다.

에어컨을 틀었다.

공기가 금방 시원해졌다.


손에 쥐고 있던 책에서 물기를 털어내었다.

그리고 책을 펴서 마저 읽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더욱 거세게 창문을 때렸다.

링링이가 오기는 오는 모양이다.


빗소리는 언제나 좋다.

자동차 창문에 떨어지는 비를 구경하는 것도 참 좋다.

책을 읽다 말고 한참 비 구경을 했다.

에어컨 때문에 시원해진 공기는 이제 서늘하게 느껴졌다.


시동을 끄고 다시 책을 읽었다.

책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 먹은 비염약 때문인지 몸이 노골거리며 졸음이 조용히 밀려왔다.


창 밖엔 비가 쏟아지고 자동차안 공기는 아직 충분히 상쾌하고 졸음은 뽀송뽀송한 고양이처럼 다가왔다.

읽던 책을 펴진 그대로 배 위에 올려 놓았다.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혀 몸을 의자에 파 묻었다.

눈꺼풀은 묵직하게 내려왔고 빗소리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우우웅~ 우우웅~

전화기 진동소리가 났다.

아내가 수업을 마쳤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자동차 시동을 걸어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가는길에 다른 동생과 오랜만에 만났다.

짧은 인사를 하고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다음에 밥을 같이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저기 아내가 건물앞에 서 있었다.

아내가 차에 올라 탔다.


링링이 때문에 한산한 도로를 여유롭고 평화롭게 달렸다.

아내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엑셀레이터를 꾹 밟았다.


비는 오고 바람도 불지만, 아내는 조수석에 앉아 스콘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나의 무탈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내를 보았다.

자세히 보았다.

힐끔 힐끔 오래 보았다.


룸미러로 내 얼굴도 보았다.

주문을 외웠다.

'자세히 보아야, 오래 보아야...'

그리고 거울속에 나를 보며 웃어도 보았다.


윗니 가운데 앞니와 윗니 작은 앞니사이에 고추가루가 끼어 있었고,

아랫니 가운데 앞니사이에 위에 것 보다 더 큰 고추가루가 끼어 있었다.


고추가루가 낀 상태로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아니 혹시 아무도 못 보았을 수도...


에라 모르겠다.

이럴땐 그냥 나 편한대로 생각하는게 내 정신 건강에는 좋다. 이미 지난일 어쩌겠는가?


아내를 보며 웃었다.

아내는 더럽다며 핀잔을 주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다시 아내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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