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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부 Dec 13. 2019

할머니의 하얀 속치마

오른손 엄지 가운데 아래쪽에 옆으로 길게 나 있는 지금은 흐릿해져 가는 상처가 있다. 낫에 베인 상처이다. 흉터가 흐릿해지는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낫이 엄지를 파고드는 느낌이라든지 손가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던 빨간피와 아무렇게 찢은 할머니의 하얀 속치마가 생각난다.


어릴 적 살던 마을은 아주 시골이었다. 얼마나 시골이었냐면 친구 집에 전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화기 오른쪽에 붙어 있는 연필깎이 손잡이처럼 생긴 핸들을 돌려야 했고 드르럭 핸들을 돌리면 교환원이 전화를 받았다.

"예, 어디로 연결해 드릴까요?" 교환원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57번 연결해 주세요"라고 말하면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며 교환원이 친구 집으로 연결해 주었다.


가끔 교환원에게 혼이 나기도 했었는데 아주 버릇없게 말하거나 장난 전화를 할 때였다. 교환원이라지만 동네 누나나 동네 이모뻘로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아주 높았을 것이다. 백 가구 남짓 있는 마을이라 마을 주민 전화번호 정도는 교환원 누나가 다 알고 있었을 테니 번호만 봐도 누구 집 누구 아들인지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 길 없는 초딩들은 교환원이 생판 남인 줄 알았고, 장난을 치거나 버릇없이 말하다간 "너 누구집 누구지!"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수화기를 집어 던지듯 내려놓곤 했었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가서 교환원과 수동식 전화기 이야기를 친구에게 해 주었더니 '무슨 구석기 시대냐?'며 아무도 믿지 않았었다. 다들 누르는 전화기나 손가락을 끼워 돌리는 전화기가 그들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전화기라며... 자라온 지역과 환경 그리고 배경이 다르면 비록 나이가 같아도 세대차이가 느껴진다.


어쨌든 같은 나이에게 세대 차이를 느끼게 하는 그 동네는 워낙 시골이라 변변한 놀 거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여름엔 푸른 바다 끝없이 펼쳐진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수영하거나 수경을 쓰고 스노클링을 하며 해삼이나 가리비를 잡는다든지, 봄이나 가을에는 산으로 들로 헤매는 지금 말로 하자면 하이킹을 한다든지, 겨울이 되면 썰매를 타거나 모닥불에 구운 고구마나 밤 혹은 가래떡을 구워 먹는 일이 전부였다.


특히 여름엔 땡볕에서 헤엄치며 노는 게 일이라 한 여름내 수영을 하면서 등어리에 껍질이 적어도 두세 번은 벗겨져야 긴 여름이 지나갔다. 바닷가의 마을에서 수영은 취미가 아닌 생존수단이다. 그러니 헤엄 못 치는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엄청난 놀림을 받았다. 그래서 친구가 생기는 대여섯 살 무렵 여름이 되면 다들 수영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영을 배운다고 이야기하니까 무슨 고상한 운동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얕은 바닷가에 모여 한두 살 많은 형이나 누나에게 엄청난 구박을 받으며 허우적거리는 것이 다여서 '수영을 배운다'라는 표현이 사실 민망하기는 하다. 한 몇 주 얕은 물가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비록 바닷물을 엄청나게 들이키기는 하지만 물에 겨우 뜰 수 있게 되고 개헤엄 정도는 할 수 있게 된다. 대여섯 살 되는 동네 꼬마들이 얕은 물가에서 허우적 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을까? 초여름 동네 아이들이 얕은 바닷가에서 허우적거리는 재미난 볼 거리를 약삭빠른 노인네들이 놓칠 리가 있겠는가?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초여름이 되면 막걸리와 안주거리를 들고나와 바닷가 앞에 평상 그늘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아이들이 허우적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몇몇 어르신들은 막걸리에 취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흥에 겨워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러다 기분이 나빠지면 서로 쌍욕을 하며 싸우기도 했다. 처음엔 노인들이 아이들을 보러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서로 쌍욕을 하며 싸우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상당히 흥미진진한 볼거리였으니 여름은 노인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잃을 것 없이 서로 좋은 날들이었다. 바닷가 어린이들이 욕을 찰지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여름을 바닷가에서 허우적거리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쌍욕 베틀을 보다 보면 헤엄도 익숙해지고 쌍욕도 익숙해진다. 그렇게 헤엄과 쌍욕이 편해질때쯤이면 여유로운 여름은 서서히 지나가고 분주해지는 가을이 온다. 가을이 되면 모두가 바빠져 한가로이 막걸리나 마시며 노는 노인들을 보기가 힘들어진다. 가을이 오면 이제 금방 겨울이 오기 때문에 짧은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들도 어른들을 도우려 고사리손으로 열심히 움직여 보지만 고사리손으로 돕는 일이 무슨 도움이나 되었을까? 이내 실증난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산으로 들로 아무 목적 없이 돌아다녔다. 노는데 무슨 이유가 있는가? 그냥 심심해서 놀 뿐이다.


가위바위보에서 지는 아이에게 설익은 감을 먹이고 침을 줄줄 흘리는 놈을 보며 배꼽이 빠져라 웃기도 하고 여름내 자란 쌉쌀한 칡을 파먹기도 했다. 가을 칡은 참 맛있었다. 그렇게 놀다 보면 날은 서늘해졌고 날이 서늘해지면 밤이 익어갔다. 잘 익은 밤은 칡보다 맛있었다. 밤이 익을 무렵이 되면 아이들은 밤나무밭에 몰래 기어들어가 한 자루 가득 밤을 훔쳐 나왔다. 매년 서리를 당하는 밤나무밭 주인은 성질이 아주 고약했다. 걸리면 머리통을 맞거나 심하면 뺨을 맞기도 했는데 부모님께 이르지 않은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 때려도 맞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밤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맛있었다. 밤을 훔치다 밤송이가 머리에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악!!'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주인에게 들킬까 봐 소리는 내지도 못하고 눈물만 그렁그렁 맺혔고 이 모습을 본 다른 아이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막으며 폭소를 터트렸다. 아마도 밤보다 이게 더 재미나서 매년 밤 서리를 하지 않았나 모르겠다. 그렇게 가시를 벗기지도 않은 밤송이를 자루에 가득 담아 줄행랑을 쳐 나와 산 중턱 어딘가에 앉아 전리품을 아금 아금 천천히 음미하였다. 산 중턱에서 보는 석양에 반짝이는 가을 바다의 풍경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당시엔 매일 마주해야 했던 지겨운 풍경이었다.


칡을 캐 먹고 밤을 훔쳐 먹다 보면 어느새 추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논밭에 서릿발이 서기 시작하면 겨울이 온 것이다. 할 일 없는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면 빨리 집으로 가는 길을 두고 서릿발 선 논을 밟으러 한참을 돌아간다. 논두렁을 지나 저수지로 가서 저수지에 얼음이 얼었나 확인했다.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머리만 한 돌을 던져 얼음이 제대로 얼었는지 확인을 했다. 돌을 던져 얼음을 깨지면 아직 덜 얼은 것이고 돌이 튕겨 나오면 충분히 튼튼하게 얼은 것이다. 얼음이 튼튼하게 얼고 나면 저수지에서 썰매를 타며 놀아야 하기 때문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다들 썰매를 만든다.


겨울이 되면 추워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지만 여름 못지않게 신나는 계절이었다. 추운 날 제대로 씻지 않고 찬 바람을 맞은 탓에 손은 터서 갈라지기 일쑤였고 콧물을 하얗게 흘러 콧물자국이 난 아이들의 모습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누구도 콧물을 흘린다고 더럽다 놀리지 않았다. 여름 햇볕에 등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겨울 찬 바람엔 손이 트고 콧물을 흘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한 어느 겨울엔 손이 너무 심하게 터서 많이 아팠었다. 괴로워하는 나를 보시며 외할머니는 동생의 아침 오줌을 받아 두셨다가 자기 전에 내 손에 촉촉이 발라주셨다. 암모니아가 갈라진 피부사이로 스며들어 너무 아팠다. 동생 오줌을 바른 뒤엔 양말을 두 손에 씌워 보습이 되게 해 주셨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거북이 등껍질 같았던 내 손은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해졌다. 신기한 나는 동생의 오줌을 바른 두 손을 두 뺨에 비비벼 그 부드러운 감촉을 즐겼다.


시골의 겨울은 그렇게 흘러갔다. 몇몇 부잣집은 연탄보일러로 바꾸었지만 우리집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고 아궁이에 놓여 있던 큰 가마솥에 밥을 안쳤다.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이 온순해지면 아랫목은 뜨끈뜨끈해졌고 이때 장작불에 고구마를 던져두면 저녁밥을 다 먹고 건져내어 나누어 먹으며 무료한 밤을 보냈다.


나는 아궁이 옆에서 불을 보며 놀았지만, 부엌 아궁이 근처에선 절대 불장난을 하지 않았다.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싼다'는 어른들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건 아니지만 부엌 아궁이 옆에서 절대 불장난을 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불장난으로 집이 타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밖에서 불장난하는 아이들에게는 웃으며 밤에 오줌싼다고 말했지만, 부엌에서 불장난하다간 오금이 저릴 정도로 화를 내었다. 그래서 내 또래 아이라면 특히 그 불을 본 아이라면 아무리 장난꾸러기 아이라도 부엌 아궁이 근처에서는 불장난을 하지 않았다. 아궁이 뒤쪽에는 장작더미와 불쏘시개로 쓰는 솔잎들이 가득 쌓여 있어 실수로라도 불이 옮겨붙으면 집이 홀라당 타 버리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집이 홀라당 타 버리는 일은 간혹 일어났는데, 집을 홀랑 집어삼키는 불길을 한 번이라도 본 아이들은 부엌에서 불장난을 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궁이에서 꿈틀거리는 불을 보는 것은 꽤 재미난 일이라 할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면 난 언제나 아궁이 옆에 앉아 얼굴이 벌겋게 될 때까지 꿈틀거리는 불을 지켜보았다. 겨울이 깊어지면 거의 매일 군불을 지펴야 하기 때문에 장작이 많이 필요했다. 장작이 줄어들면 집안 남자들이 나무를 해 왔지만, 장정들이 바쁜 시기엔 어쩔 수 없이 집안 여자들도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장정들이 나무하러 갈 땐, 큰 나무들을 자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거저 걸리적거리는 짐 같고 다치기 쉬운 위험한 존재이지만 여자가 산에 나무하러 갈 땐 쓸모없는 아이라도 옆에 있는 것이 안심되었는지 할머니는 내가 따라 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그날도 난 할머니를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갔다. 할머니는 불쏘시개로 쓸 솔잎파리를 엮으셨고 장작을 대신할 나뭇가지들을 모으셨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나는 자치기에 쓸만한 나무를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 자치기는 겨울 놀이의 끝판왕이었다. 동네 남자아이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자'를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자기가 만들지 않으면 아버지가 만들어 주거나 집안 남자들이 만들어주었다. 나는 내 자를 직접 만들었다. 손에 쥐기에 좋은 적당히 굵은 반듯한 소나무가지를 골랐다. 키 높이 정도에 있던 소나무 가지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에 낫자루를 꽉 잡아 사정없이 소나무가지를 내려치면 날 선 낫에 소나무가지는 이내 잘려 나갔다. 그럼 톱을 사용해 적당한 길이로 자치기 채를 만들었다. 그리고 손잡이 부분을 제외한 부분은 이쁘게 껍질을 벗겨내어 뽀얀 소나무결이 보이게 하였다. 이미 몇 개 만들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능숙하게 채를 만들었다. 하지만 길이가 짧은 자치기의 알은 손이 많이 갔다. 알은 두 종류로 만들었는데 쉽게 만드는 방법은 알의 양 끝을 뾰족하게 하는 것인데 이렇게 만든 알는 너무 흔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알은 양 끝을 마름모 모양으로 이쁘게 깎은 것이었다. 제법 도톰한 소나무 가지의 양 끝을 마름모 모양으로 대칭이 되게 깎으려면 아주 성가신 일이지만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충분히 보람 있는 일이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 알을 만들려면 일단 낫을 가랑이 사이에 꼭 고정시키고 적당한 크기로 자른 알의 양 끝을 마름모 모양이 되도록 깍아 나가면 된다. 내가 알을 깍아내는 동안 할머니는 너댓걸음 떨어진 곳에서 잔가지를 모으고 있었다. 멋진 알이 될 조그만 소나무 조각을 손에 꽉쥐고 가랑이 사이에 고정한 낫날에 알를 깍았다. 세게 당겨야 반듯이 잘려져 모양이 이쁘게 나왔고 약하게 당기면 아에 깍이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옹기가 있는 부분은 더 강하게 당겨야 하는데 이번에 깍는 알에 작은 옹기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 세게 낫에 엇대어 알을 당겼다. 나무가 이쁘게 깍여 나갔지만 섬찟한 느낌이 등줄기를 지나갔다. 너무 깊이 깍은 탓에 낫날이 오른손 엄지를 훓고 지나갔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아직 아프지는 않았지만 뭔가 아주 잘못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오른손 엄지를 조심스레 보았다. 벌어진 살점사이로 새빨간 피가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빨간 피는 손목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사실을 인지하는 동시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옆에서 나무를 하던 할머니는 나의 울음소리를 듣고 뭔가 아주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엄지를 붙들고 피를 뚝뚝 흘리는 나를 본 할머니의 눈이 커졌다. 할머니는 본능적으로 속치마를 북북 찢어 피를 닦아 내었고 상처를 확인했다. "우짜노, 우짜면 좋노..." 울음섞인 할머니의 목소리에 불안해진 나는 더 크게 울었고 할머니는 더 불안해 했다. 할머니는 다시 속치마를 찢어 오른손 엄지를 동여 메었다. 오늘 밤에 쓸 장작더미와 지게를 버려두고 할머니는 나를 들쳐 업고 뛰듯 산을 내려왔다.


"우짜노, 아이고.. 우짜노..."를 되뇌이며 산을 내려오는 내내 할머니는 울먹였고 등에 업힌 나도 울었다.


그때의 흉터가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는걸로 봐서는 당시에 꽤 깊은 상처였나 보다. 시골 동네에 병원은 없었지만 긴급처치를 해 주는 마을에서 의사로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분명 의사 면허가 없었을테지만 그 어느 의사보다 잘 치료해 주셨던 분이셨다. 다행히도 그분이 우리 뒷집에 살고 있었다. 산을 내려오는 동안 엄지를 싸 메었던 하얀 속치마가 빨갛게 변했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내 울음도 그칠 줄 몰랐다. 아픔과 공포에 우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우짜노.. 우짜면 좋노..."를 주문처럼 말하며 울먹였다. 마침내 동네 의사선생님 집에 도착했고 나는 할머니 등에서 내렸다.


"다 큰 놈이 할머니한테 업여 오나?" 선생님이 꾸짖듯 말했다.

선생님은 상처를 싸메었던 하얀 속치마를 풀고 소독약으로 상처를 씯어내며 상처를 보았다.

"제법 깊네..." 심각한 듯 말했다.


하얀 지혈 가루를 뿌렸고 하얀 지혈 가루틈으로 피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가 멈추었다. 피가 멈추자 하얀 면붕대로 엄지를 꼭 싸메어 주었다. 심장이 뛰는 리듬에 맞춰 엄지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뒤를 돌아 할머니를 보았다. 손자를 등에 업고 산을 내려온 할머니의 비녀 꽂은 머리는 풀려 어느샌가 망나니의 머리가 되었고 엄동설한 겨울날 할머니의 이마엔 땀이 송글 송글 맺혀 떨어졌다. 손에 붕대가 감겨지고 괜찮을거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들은 후에야 할머니는 머리를 다시 가다듬었다. 희끗해진 머리칼을 뒤로 모아 시집올 때 해 온 비녀를 다시 꽂았다. 그리곤 이마에 흐르던 땀을 닦아 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귀여운 남동생과 떨어져 혼자 어린 시절을 보내던 나에게 할머니는 엄마였고 아빠였으며 형제이자 친구였다. 이제는 희미해져가는 오른손 엄지에 난 할머니의 흔적을 볼때면, 손주를 등에 업고 거친 산길을 내려오던 할머니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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