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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부 Jan 08. 2020

큰 딸의 첫 방학

두딸은 짐승이 되었다.

큰딸의 첫 방학

<그리고 딸들은 짐승이 되었다>


대학에서 첫 번째 학기를 보낸 큰딸이 집에 온 지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가고

다시 대학 기숙사로 갈 날이 일주일 정도 남았다.


디자인을 전공하려 하는 큰딸은 대학에서의 첫 번째 학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숙제와 과제작품을 만들기 위해 새벽에 잠이 드는 것도, 

밤을 새워 작품을 마치는 일도 꽤 자주 있었다고 했다. 


억지로 미간에 주름을 잡아가며 지난 학기가 얼마나 힘들었지,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수업이 얼마나 어려웠고 과제는 얼마나 많았는지 말했다. 

그리고 같이 사는 친구들은 뭐가 좋았고 뭐가 이상한지, 

교수들은 누가 이상하고 누가 더 이상한지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멀쩡한 교수는 없다'라는 진실을 벌써 눈치채다니 대단하다. 켘


미간에 억지로 잡힌 주름은 힘을 빼면 금세 풀렸다. 

아마도 아직 풍부한 콜라겐 때문이리라! 

내 깊게 파진 미간을 보며 딸의 콜라겐이 부러웠다. 

한참 큰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친구 이야기를 듣는 착각에 빠졌다. 

웃음이 났다. 

친구의 이야기는 절반 이상은 허풍으로 채워져 있었다. 

큰딸의 방학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제 거의 끝나간다.


큰딸은 새벽에 도착했다. 

그래서 그런지 집에 도착해 아침을 먹은 뒤 

독 사과를 먹은 백설공주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사실 백설공주보다는 백설기에 가깝긴 했지만 

곤히 자는 큰딸의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도 했고 측은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이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뒤로 큰딸이 보여준 모습은 폐인과 백수를 환상의 비율로 절묘하게 섞어 놓은 모습이었다.


방은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쓰레기장이 되었고 

방에 들어갈 때마다 넷플릭스 드라마나 영화 혹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마치 지난 학기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는냥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생산적인 일은 격렬하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저분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둘째 딸은 언니가 너무 지저분하다고 불평을 했다. 

누가 누구한테 지저분하다고 하냐며 둘이 싸움이 났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드는 지저분함의 완성도는 최고의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두 사람이 만드는 시너지는 환상적이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양말들, 속옷들, 바지들, 반소매 티셔츠들로 구성된 옷가지부터 

귤껍질, 과자 부스러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지만 한때 음식이었던 게 분명했던 것들이 뒹굴고 

여기에 충전케이블들이 엉켜 여기저기 먼지 뭉치와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문제는 바닥이나 침대 위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아침 늦게까지 늦잠을 자기 위해 내려놓은 차양 때문에 방은 어두컴컴해 마치 동굴을 연상하게 했다.


동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두운 동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 두 마리가 살고 있다. 

그것들이 짐승인지 사람인지 아니면 짐승이 된 사람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람이 된 짐승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누구도 그 동굴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두 딸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동굴에 들어왔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내 목덜미를 물어뜯어 머리를 몸뚱이에서 떼어 낼 수도 있다. 

할 수 있다면 이 동굴에 들어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두 딸을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한발짝 한발짝 천천히 동굴로 들어간다.

하루에 몇 번씩 두 짐승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들의 싸움을 그치게 하려면, 그리고 어떻게든 유혈사태를 막으려면...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내가 짐승이 되는 수밖에 없다. 

몸을 최대한 크게 부풀리고 아주 큰 소리를 내어야 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소리를 지른다. 

그럼 두 짐승은 잠시 조용해지고 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두 짐승도 가끔 사람에 가까운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한 달에 한번 보름달이 뜨면 사람으로 변해 방을 치우기도 하고 세수를 하거나 심지어 이를 닦기도 한다. 

그리고 백 년에 한번 붉은 보름달이 뜨며 샤워라는 것을 한다. 

문제는 샤워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듣고 있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래도 냄새가 나는 것보다 노래를 듣는 편이 나아서 참고 듣는 수밖에 없다.


한 달이 벌써 지나 한 일주일 남았다. 

두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도 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두 짐승이 가끔 사람이 되기도 하는 시간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면 둘째 딸은 두 번째 외동놀이를 시작할 것이다. 

봄학기는 5월이되어야 끝이 나니 5개월 동안 다시 얻은 외동딸과 무엇을 할까 고민이다. 

그래! 둘째 딸이 제일 싫어하는 책읽기놀이를 해야겠다.

둘째 딸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오르고 내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대학에서 첫 번째 학기를 보낸 큰딸이 집에 온 지 한 달이 지나 버렸다.



2020년 1월 8일 오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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