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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부 Jul 09. 2021

우울한 딸

딸은 그렇게 어른이 되고 있다.

어느 날 딸은 아내에게 우울하다고 말했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엄마가 더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딸이 고맙기만 하다.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쿵하고 간이 떨어졌다.

'나 때문인가? 내가 무슨 짓을 했던 거지? 아니 뭘 안 했던 거지?'


딸과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리려 노력하며 아내에게 물었다.


"왜 우울하데?"

"정확하게는 모르겠고, 자기가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지금 자기가 공부하는 것에 재능이 있나 이런 생각이 든데.. 그래서 불안하데.."

"그 나이땐 다 그런 거 아냐? 아직 애기인데?"

"그래도 불안한가 봐,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죠, 잘하는 사람은 너무 많고..."

"그러면서 자기 걸 찾는 거지 뭐, 잘하는 사람이야 언제나 있고... 딸도 잘하는데..."

"그래도 우울하데.."

"... 그렇군..."


우리는 말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달려 흔들리는 이파리들을 보며 적당히 식은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그 나이에 의례 느끼는 감정인지 아니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아내와 나는 우리 젊은 날의 경험에 빗대어 딸이 던진 몇 실마리로 딸의 우울과 불안의 깊이를 추측해 보았다. 


우리의 젊은 날 역시 평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대 초반의 나이,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시기, 고민과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던 시기,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때 우리가 우울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슬픔은 기억이 나지만 우울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대 나는, 우리는 우울했었나? 아니면 지금의 딸보다 더 철이 없어 경험하지 못했었나?' 아마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미래에 대해 계획하지도 않았고 나의 재능이나 능력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았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내 앞에 놓여진 시간을 탕진할 뿐...


20대를 지나 지금 20대가 된 딸이 있는 나이가 되자 다시 나의 20대를 돌아본다. 지금의 딸에 비해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던 그런 모습이었음이 분명한데 왜 우울한 기억은 나지 않는 것일까?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런 날들을 보내며 방황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기억은 어찌하여 어렴풋한 즐거움인가?


일상과도 같았던 그때의 어느 저녁이 기억났다. 메탈 동아리 친구와 함께 저녁으로 라면 한 그릇 시켜 놓고 소주 2병을 마시고 반쯤 취해 동아리방으로 가 밤이 늦도록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동안 담배연기는 동아리방을 가득 채웠다. 공연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연주 연습을 한 것도 아니었다. 분풀이하듯 소리를 지르고 미친 듯이 웃었다. 아니 미쳐서 웃었다.


그렇게 하루가, 일주일이, 그리고 한 학기가 지나갔고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 지금은 나의 아내의 남편 그리고 딸들의 아빠가 되어 있다. 찌질하고 비루했던 나의 20대 초반의 기억을 두세 번 돌아보았다. 쓴 미소와 함께 안도감이 느껴졌다. '지나갔구나...'


'딸은 좋아질 것이다.' 시간이 지나 지난날을 돌아보며, '지나갔구나' 안도할 것이다. 딸이랑 이야기하고 싶어 졌다. 딸은 방에서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자며 딸을 불러내었다. 딸은 순순히 나왔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기분이 많이 안 좋아?"

"아니, 기분은 괜찮아"

"그럼 많이 불안해?"

"음... 불안하지"

"뭐가, 불안해?"

"음...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 하기 싫은데..."

"이런 이야기 엄마, 아빠랑 안 하면 누구랑 하니?"

"..." 


"뭔가 불안해?"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지금 하는 게 적성에 맞는지 모르겠어"

"아빠가 볼 때는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음... 고등학교 때 미술을 시작한 건 사실 그때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럴 수 있지. 그 나이에 뭘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어디 있냐?"

"... 다른 애들은 재능고 있는 것 같고 잘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있어?"

"비교가 되고 경쟁이 되지, 어떻게 안돼?"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피할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할 뿐이겠지. 딸 역시 비교나 경쟁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교나 경쟁을 안 할 수가 있을까? 딸의 푸념은 정곡을 찔렀다. '그래, 이 시대에 비교와 경쟁을 안 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지... 하지만 남을 이기기 위한 비교나 경쟁은나은 내가 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거든. 진정한 비교는 어제의 나와 하는 것이고 진정한 경쟁은 지금의 나와 하는게 좋아. 그럼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도 경쟁할 필요도 없어져. 나랑 비교하고 경쟁하기도 바쁘거든... 진정한 성장은 그렇게...'


잠시 고민한 뒤, 용기를 내어 딸에게 이야기했다.


"왜 비교하고 왜 경쟁해야 해?"

"..."

"아빠는 니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니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건 다른 사람과 너를 비교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하는 것에 확신이 안 서"

"그 나이에 확신이 서는 게 좋은 것일까? 뭐든 할 수 있는 나이고 뭐든 새로 시작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이인데?"

"그래도 하는 건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해야지, 그렇다고 해서 지금 하는 걸 평생 동안 해야 할 필요는 없어.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는 있지"

"그렇지" 딸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의 니 모습이 나중의 니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마"

"무슨 말이야? 당연히 그렇겠지"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지금의 니 모습, 너의 재능, 너의 실력을 가지고 너를 단정하지 말라는 거야. 나중의 너는 훨씬 더 멋지게 될 거니까. 지금의 니 모습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하면 언제나 실망하고 우울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지만, 비교가 되는 걸 어떡해?"

"음... 그래서... 그러니까 일부러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친구가 잘할 때 칭찬해주고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그렇게 말을 하다 보면 마음도 그렇게 되더라"

"..." 딸은 대답하지 않았다.

"좋은 성적 받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돈 많이 버는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닌 것 같아"

"..."


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인기와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진리이지만 인기와 돈은 진리를 무시할 만큼 매력적이다. 하지만, 인기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사람을 만나거나 진정한 친구가 없어 불행한 시간을 보내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부럽지 않은 명성과 재물을 가지기 위해 인간됨을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라 이야기하지만 남부럽지 않은 것 같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남 눈치만 보고 산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나는 내 딸이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하고 싶지 않다. 좋은 대학을 가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남 부럽게 돈을 벌지 못한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만족함을 배우지 못하면 감사함을 배우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마음이 즐거운 일을 하는 게 좋은 것 같아. 마음에 만족함을 주는가 충족감을 주는가 그런 것에 더 집중해야 할 듯해"

"그럼 취직은? 취직해야 돈 벌고 살지"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걸 지금 미리 걱정해야 해? 때가 되면 그때 하면 되지. 그리고 돈을 꼭 취직해서 벌어야 하나? 니가 하는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도 있지. 때가 되면 그때 걱정해도 돼 ㅎㅎ"

"취직하려면 성적 잘 받아놔야지"

"지금도 충분히 좋아. 혹시 나중에 취직이 안되었다고 쳐. 그럼 그때 다시 고민하면 된다. 취직이 안된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냐. 모두 지나가는 과정이야.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려. 그게 인생인 것 같아"

"걱정이 되는데 어떡해?"

"그래 걱정이 되지. 맞아 그럴 땐 '별 것 아니다. 다 지나간다' 이렇게 생각하자. 진짜 그래, 지나면 정말 별 것 아니더라 ㅎㅎ"

"말은 쉽지" 딸의 말이 좀 가벼워졌다.

"그래 말은 쉽지. ㅎㅎ 쉬우니 말부터 해 보자. 별 것 아니다. 지나간다. 비교하지 말자. 말부터 해보지 뭐"

"..."

"괜찮아. 엄마, 아빠가 있잖아"

"알아..."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다 해서 우리까지 그렇게 살 필요는 없잖아. 즐겁게 살자. 그렇게 즐겁게 살면서 가능하면 다른 사람도 즐거울 수 있게 도와도 주고, 우리 그렇게 살자. 응?"


말을 하고 보니 내 다짐을 딸에게 말했다. '딸아, 아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게' 


딸을 보았다.


우울한 딸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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