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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부 Aug 13. 2021

내일이면 출발

딸과 떠난 일주일간의 제주 여행 05

딸과 떠난 일주일간의 제주 여행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한라산 등반코스에는 휴게소 아니 대피소가 있다. 음식은 팔지 않는다. 그러니 컵라면을 팔지 않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런데 '한라산 정상에서 먹었던 컵라면, 너무 맛있었어요!'라는 등반 후기는 뭘까? 컵라면이야 배낭에 넣어가면 되지만 뜨거운 물은?


보온병

컵라면을 포기해야 하나? 컵라면을 포기할 수는 없다! 보온병 빌려주는 곳은 없나? 빌리러 가고 반납하러 가고.. 귀찮다. 가서 살까? 그럼 올 때 짐이 늘어난다.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보온병을 가져가는 방법이 최선인 것 같다.


딸이 여행 일정을 보내왔다. '그냥 대충 적은 거야. 걍 인스타 보고 막 적은 거임. 먼가 그냥 프리스타일한 느낌...

:-0'이라는 이모티콘과 함께...


월요일 : 대포 주상절리 / 황우지 해안 / 백약이오름 / 올레시장

화요일  : 한담 해안 산책로 / 금악오름, 새별오름 / 곽지 해수욕장 / 명진전복 (전복전복전복)

수요일 : 한라산 등산 / 제주 곰집 (고기고기고기)

목요일 : 한림공원 / 사려니숲길 / 놀맨 (라면라면라면)

금요일 : ?? / 제주 동문시장


출발은 내일이다. 옷가지를 정리했다. 속옷 5장, 양말 5켤레, 반팔 3장, 반바지 2개, 잠옷 반바지 1개 , 얇은 긴팔티 1개. '이것만 있으면 되려나?'


내일 할 일을 체크해 보았다.

1. 일어나 씻고 밥을 먹는다.

2. 쓰레기를 버린다.

3. 옷가지는 이미 캐리어에 넣어 두었으니 백팩에 넣을 것을 챙긴다.

4. 백팩에 넣을 것은 다음과 같다.

    1) 아이패드와 키보드

    2) 충전기와 케이블

    3) 카메라와 충전기

    4) 모자

    5) 음.. 이게 다인가?

    6) 비행기 시간이 2시 50분, 30분 전에 탑승

        ㄱ) 집에서 11시에 버스를 타고

        ㄴ) 신논현에 내려 9호선을 타고 공항까지 간다.

    7) 제주에 도착하면 렌트카에 연락한다.

    8) 차를 타고 일단 숙소로 간다.

    9) 숙소에 가면 저녁 시간이네. 음... 저녁은 뭘로 먹지?


일주일 동안 철없는 둘째 딸과 스펙타클한 시간을 보내게 될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여행 떠나는 언니를 부러워하는 둘째에게도 미안하다.


딸이 있기 전 아내와 나는 단 둘이서 지냈다. 2년 반 정도 둘이서 지내다 보니 둘이서 지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혼자가 어색해졌다. 딸이 태어나고 세 명이서 지냈다. 다른 딸이 태어나고 네 명이서 지냈다. 가족이 한 명 또 한 명 늘어나면서 네 명이서 지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네 명이 어디를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누군가 한 사람은 준비가 늦거나, 출발하려면 누군가 뭔가를 빠트렸거나, 진짜 출발하려 하면 꼭 누군가는 화장실을 가야 한다. 아무리 일찍 준비해도 늦다. 누군가 기분이 좋으면 누군가는 기분이 안 좋다. 그렇게 네 명이서 지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딸과 둘이서 여행 짐을 챙기다 마음에서 '쿵'하는 소리가 나서 놀랐다. 짐이 너무 빨리 챙겨졌다. 두 번 세 번 확인을 해도 시간이 얼마 안 걸렸다. 뭐지?


허전함이었다.

'그거 챙겼냐?' '안 챙겼다' '그럴 줄 알았다. 언릉 챙겨라'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한다' '아이고, 그건 왜 챙기냐? 필요 없다' '잔소리하지 마라. 나는 필요하다. 내 마음이다' 이런 류의 이야기로 밤늦게까지 짐을 싸다 지쳐야 하는데... 너무 단촐하다.


딸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네 명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호사스러움을 동시에 누릴 수는 없다.


딸과 단 둘이 떠나는 여행.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기회. 하지만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가 아쉽다.


밤이 깊어 간다. 카메라 SD 카드를 포맷하며 마음을 다 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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