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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부 Aug 15. 2021

월요일 저녁, 서귀포 가는 길

딸과 떠난 일주일간의 제주 여행 06

다 커버린 딸과의 여행은 적당히 편하고 적당히 낯설다.

놓칠 것을 알면서도 뛴다.

저기 5006번 버스가 신호에 걸려 있다. 나도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무단횡단을 하고 싶지만 여행 가려면 일단 살아 있어야 한다. 어떤 불이 먼저 켜질까? 딸과 눈이 마주쳤다.


"일찍 나오자고 그랬지?"

딸의 목소리에서 아내의 서늘함이 느껴진다.

"이것도 일찍 나온..., 시간은 충분해"

"..."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제발...' 기대와는 다르게 버스 신호가 먼저 바뀌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할 때쯤 횡단보도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었다. 횡단보도에서 정류장까지는 200미터. '할 수 있을까?' 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뛰게 된다. '그래도 노력은 했다'는 핑계가 필요했던 걸까? 버스가 정류장을 떠나는 걸 보고서야 걸음이 느려진다. 아니 걸음이 슬퍼진다고 해야 하나?


딸과 나는 정류장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딸은 챙겨 온 손 선풍기를 꺼내어 틀었다. 습기 가득한 미적지근한 바람이 얼굴로 불어왔다. 시원했다. 급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호숫가의 나무 그늘 밑에 앉아 바람을 맞는 듯 여유로와졌다.


'기다리는 건, 이렇게 여유로운 거였구나'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지 않았는데 다음 버스는 생각보다 일찍 왔다. 백팩을 메고 캐리어 가방을 들고 버스에 탔다. 가방 때문에 딸은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신갈 ic를 나와 고속도로를 달렸다. 판교 ic로 가는 사이 잠깐 보이는 숲이 평온해 보였다. 한 여름에만 볼 수 있는 짙은 녹색이다.


건너편에 앉은 딸은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꽂고 전화기를 보기 시작했다. 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아저씨, 뭘 봐요?'라는 표정이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빨리 걸어서 그런지 목이 말랐다. '내리면 물을 사 먹어야겠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딸의 백팩 옆에 꽂인 빨간색 물병이 보였다.


"물 있어?"

"응"

"오~ 물 좀 줘"

"싫어!"


딸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병을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미적지근한 물이 시원했다. '생각보다는 준비성이 있군.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하며 한 모금 더 마셨다. 마침 버스가 흔들려 물이 코로 들어갔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코 안쪽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코가 찡해 죽을 뻔했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갔다. 월요일 정오 지하철은 한산했다. 내리는 사람, 타는 사람,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사람 구경을 하다 보니 김포공항역에 도착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 딸과 나눈 이야기이다. '내 기억 속의 공항은 낭만적인 곳이야. 그땐 배웅하러 탑승구까지 같이 와서 비행기 시간까지 같이 기다렸어. 떠나는 사람은 게이트로 걸아가며 몇 번을 뒤돌아보면서 비행기에 탔어. 보내는 사람은 탑승구 창가에 서서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고서야 뒤돌아 집으로 갔지.'


"너 그거 알아? 옛날엔 배웅하러 탑승구까지 같이 와서 기다렸다?"

"알아"

"어? 어떻게 그걸 알아?"

"알지. 911 때문이지"

"오~ 대단한데.."


911이 2001년에 있었는데 2001년생인 딸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태어난 해에 일어났던 일이었으니... 딸과 이런 이야기를 하며 체크인을 하고 검색대로 갔다. 안전 때문인 지는 알지만, 신발을 벗고 허리띠를 풀고 주머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조그만 소쿠리에 넣어야 한다. 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낼 땐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 매력 없고 무정한 보안 검색대를 지나 탑승구로 갔다.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렸다. 딸은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끼고 '젤다'를 했다. 나는 옆에 앉아 비행기가 이륙하는 모습을 보았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다 부드럽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무리 보아도 지겹지가 않다.


우아한 모습이다.

비행기가 내는 소리와는 다르게 비행기의 움직임은 우아하다. 제트엔진이 켜지고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속도가 천천히 올라간다. 속도는 점점 빨라져 시속 230km가 되면 유영을 하듯 부드럽게 공기 속으로 미끄러진다. 웅~하는 느낌과 함께 비행기는 공기 속 유영을 시작한다. 진정 자유롭게 된다. 멋지다. '맨날 보면 지겨울걸요?'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자신 있게 '나는 아니던데요!'라고 말할 것이다. 공군에서 군생활을 하며 2년이 넘게 비행기가 이륙하는 모습을 보았다. 비행기가 공기 속으로 미끄러져 사라지는 모습은 여전히 멋있다. 땅에 발이 묶여 살던 거대한 생명체가 진정한 자유를 찾는 모습 같다.


탑승구가 열리고 비행기로 들어갔다. 비행기를 탈 때 가끔 드는 생각이 있다. '나는 오늘 죽어도 괜찮은가? 그간 잘 살았나? 아내와 아이들은 나 없이도 잘 살겠지? 그래야지...' 비행기는 시간에 맞추어 활주로를 달렸다. 웅~하고 하늘로 미끄러졌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현기증이다. 잠을 부르는 느낌이다. 물안에 있는 느낌. 잠시 책을 읽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눈을 떴다. 딸은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김포에서 제주 간 비행시간은 한 시간이 채 못되었다. 선잠에서 깨어보니 도착시간이다. 비행기는 퉁명스럽게 땅에 내려앉았다. 짐을 찾고 차를 빌렸다. 가장 저렴한 경차여서 그런지 그 흔한 블루투스 기능도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음악은 포기해야 한다.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숙소로 가는 길은 제주도를 종단으로 가로질러 간다. 제주의 풍경이 익숙한 듯 낯설다. 한국인 듯 한국 아닌 한국 같은 풍경, 적당히 편안하고 적당히 낯설다. 다 커버린 딸과의 여행이 그렇다. 익숙한 듯 낯선 여행...


숙소에 도착하면 저녁이 될 것이다. 공기는 습했지만 창문을 모두 열고 제주의 습한 바람을 맞으며 산길을 달렸다. 화산섬 구름과 길을 따라 심긴 야자수가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었지만, 시들어 누렇게 된 이파리가 '여기는 제주! 여기는 아직 한국!'이라는 사실을 묵묵히 전해 주었다.


월요일 저녁 서귀포로 가는 길은 익숙한 듯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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