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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부 Nov 23. 2021

여분의 시간

나와 마주 앉아 몇 마디 나누었다.

세미나 발제를 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며 한두 개 열기 시작한 인터넷 검색창이 열수 개가 되었다. 하지만 ppt페이지가 늘어가는 걸 보면서 뭔가 하는 것같이 느껴져 뿌듯해졌다. 오늘의 할 일로 정하고 시작한 일이라 가능하면 오늘 안에 마치려 했다. 내일 계속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며 발제 준비를 마치고 나니 학교 수업을 마친 딸아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딸아이도 오늘의 할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온 것이다.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는 것도 하루 할 일 중 하나이다. 저녁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다. 아침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기는 하지만 점심이 있기에 참을 수 있다. 그리고 저녁이 있기에 점심도 참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저녁을 참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할 일이 없어졌다.

 

할 일 없는 무료한 시간을 잠시 보내다 TV를 틀었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 후보로 나온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변호하는 사람들을 보면 시간이 곧잘 흐른다. 사람의 감정을 쥐어짜며 대리만족 혹은 욕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알차게 보내게 해주는 드라마같이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 같은 것은 정치는 어쩌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국민을 위한 나라의 복지정책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감정을 쥐어짜거나 대리 만족하는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욕은 제대로 할 수 있으니 이만한 카타르시스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욕할 가치가 느껴지지 않으면 카타르시스도 없으니 오늘 TV는 재미가 없었다.


TV를 끄고 책을 집어 들었다. 몇 줄 읽어 내려가다 '이제 어디로 가지?'라고 적힌 문장에 눈이 멈춰졌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작가의 물음 앞에 나도 멈추어 섰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작가의 물음은 나를 멈추게 하였다. '이제 어디로 가지?'라는 질문은 '이제 무얼 하지?' '왜 그걸 하지?' '하고 싶은 게 뭐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걱정은 아니다. 그냥 쓸데없는 질문들이다.


걱정이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혹은 두려움 때문에 오는 우울한 것이라면 이 쓸데없는 질문들은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 있다. 할 일을 찾았을 때, 이유를 찾았을 때 그리고 재미를 찾았을 때 느낄 희열이라는 일말의 희망 말이다. 소풍에서 했던 보물찾기 놀이같이 보상이라고는 고작해야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뿐이지만 꽤 오랜 시간 보물을 찾아 헤매는 시간은 즐거웠다. 아니 즐거웠다고 기억된다.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은 뇌라는 놈도 믿을 수 없는 놈이라 지난 일을 있는 그대로 다시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생각나게 하는 놈이라는 걸 알고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러니 생생한 현실은 지금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뇌라는 놈이 이 생생한 현실을 허풍쟁이처럼 부풀리든지 아니면 아지랭이 마냥 아련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질문 덕분에 나는 나와 마주 앉아 나와 몇 마디 나누어 본다.


"그간 잘 지냈어?"

"뭐, 그럭저럭, 너는?"


"나도 뭐... 별건 없어, 근데 그거 알아? 너도 이제 나이가 되었더라..."

"그렇더라고... 요즘 나도 놀란다. ㅎㅎ"


"웃는 거 보니 그래도 괜찮은가 보네"

"웃지! 아니면 우냐?"

"그건 그래"


"..."

"..."


"..."

"야, 근데 오랜만에 만나 나이 들었다는 이야기밖에 할 게 없냐?"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생각이 나서..."


"너 너무 생각 없이 사는 거 아냐?"

"생각이야 하지!"

"무슨 생각?"

"음... 그러니까 예전 같지 않다?"


"그게 나이 들었다는 거잖아, 멍충아"

"ㅋㅋ 그렇지?"

"웃기는"

"웃지 우냐? ㅋㅋㅋ"

"그건 그래 ㅋㅋㅋ"


오랜만에 나는 나와 함께 웃었다.


"요즘 무슨 생각해?"

"그건 니가 더 잘 아는 거 아냐?"

"그래도 물어보고 싶어서..."


"음... '사는 게 뭘까?' 이런 건데 뭐 후회나 회의나 이런 건 아니고 '어떻게 살면 보람차게 살 수 있을까?'이런 생각?"

"올~~ 허세 ㅋㅋㅋ"

"허세는 무슨, 아깝잖아. 시간이 그냥 그냥 지나가는 게"


"ㅋㅋㅋ 그러는 인간이 시간만 나면 다음 뉴스, 네이버 뉴스, 페이스북 그러다 넷플릭스나 보고 있냐?"

"야! 그럼 하루 종일 진지하냐?"

"헐 '하루 종일 진지'란다. 누가 들으면 속겠다. 이놈아!"

"ㅋㅋㅋ"

"웃기는 ㅋㅋㅋ"


"그런데 말이야. 음.. 보람 있게 살고 싶은데... 그런데, 사람이랑 안 부딪히고 보람 있게 사는 방법이 있을까? 갈수록 사람이 싫어지냐, 만나던 사람들은 괜찮은데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게 쉽지가 않네..."

"그렇지 뭐,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냐?"

"그래도 있지 않을까? 새로운 사람 만나 서로 알아가고..."

"어릴 때나 그렇지"


"우리 아직 어린...건 아니지만 늙은 것도 아니잖아"

"그럼 나가서 새로운 사람들 만나고 알아가고 친구가 되고 그러면 되잖아! 지가 이야기해 놓고 나한테 뭐라 그러냐 참나"

"그게 아니라 그렇다고... 뭐라 그러는 건 아니고..."


"..."

"..."

"..."


"괜찮다. 사는 게 뭐 별거 있냐? 하루하루 재미나게 사는 거지. '보람 있게 사는 게 뭘까?' 고민하며 살다 보면 보람 있게 사는 방법을 찾지 않을까?"

"그렇겠지?"

"괜찮다. 하루 이틀 살아 봤냐?"

"그렇지"


"피곤하다. 잘란다."

"안다. 안 자고 맥주 마실 거지? tv 보면서?"

"헐~ 대박"

"멍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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