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후 만들었던 포토북을 꺼내왔다. 먼지부터 닦아야 할 정도로 오랜만에, 우리의 찬란했던 시절을 회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싸이월드에 추억을 차곡차곡 저장하던 시절, 신행을 마치고 돌아와 그는 자신의 홈피에 내 사진 한 장과 석 줄의 코멘트로 우리의 여행을 기록해 놓았다. 황당한 건 나였다. 세상에, 자판기에서 1.5L 생수가 나올 줄 누가 상상해?! 날 사랑한다는 맥락이 아무래도 좀 얄궂었지만,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고백이 좋아서, 포토북 맨 앞장에 그대로 타이핑해 넣었었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입 밖으로 잘 안 내는 사람이라, 증거를 남기듯, 두고두고 보며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보틴, 헤밍웨이의 단골집으로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레스토랑이 된 곳. 여행 전부터 꼭 먹어보리라 벼르고 벼른 강추메뉴 새끼돼지 통구이!!! 한 마리를 네 등분 한 것이 1인분으로 나온다. 하나밖에 없는 돼지꼬리에 당첨되는 행운?이 나에게! 웁스!”
뭣도 모르고 2인분이나 시켰는데, 너무 비려서 곁들여 나온 알감자로 허기를 채우고, 분위기 값으로 비싼 비용을 치러야 했던 신행 첫 만찬이었다. 코치니요 아사도, 이름도 비쥬얼도 잊히지가 않네.
“이미 몇 시간이고 ‘얼음’이었을 행위예술가, 배꼽시계가 ‘땡’을 해준 듯 서둘러 짐을 싸는 모습이 충격적으로 낯설다. 움직여야 할 것이 멈춰있거나, 혹은, 멈춰있어야 할 것이 움직이거나. 이래저래 눈길을 끄는 거리의 예술가들.”
대작이 전시되어있는 세계적인 미술관도 놀라웠지만, 완벽한 분장을 하고 신통방통하게 정지해 있는 거리의 예술가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정말 컸던 기억이 난다. 너무나 예술적일수록 3D업종이란 생각에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지만 말이다.
“역에서 내려 똘레도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태양의 문을 향해 타박타박 걷는 중.. 단짝 친구와 여행 온 이국소녀의 찰랑이던 머릿결, 똘레도의 나른한 오후햇살에 더욱 여유로워 보이던 2차선 도로, 맹~ 하며 카메라를 기울이는 오빠의 목소리..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찰나의 느낌을 전해준다.”
마법을 부리는 듯 하는 사진이 있다. 그 순간의 공기, 온도, 소리와 느낌, 그 모든 무드를 고스란히 재생해 주는, 그래서 유독 애착이 가는 그런 사진 말이다.
“무겁게 메고만 다녔던 삼발이가 본연의 임무를 완수하던 날, 처음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남겼다. 여행 중 나보다 카메라 앵글을 더 많이 보던 것에 서운하기도 했던 기억이.. 그런데, 늘 당신의 것에만 집중한다 여겼던 지난 시간을 거슬러 보니, 그 안에 내가 있었다. 나에게 최선이었던 당신의 마음이 있었다.”
오글거린다. 감정에 푹 빠져 과장된 표현들이 민망하기도 하다. 그래도, 우리가 가장 열렬히 사랑했던 시절을 반추하자니, 새롭게 그립다. 내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옆모습, 내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 그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앞모습까지.. 나를 열심히도 찍어주었던 ‘오빠’ 지금은 어디에...?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 뙤약볕에 시들어 버린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이 되어준 곳.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지만 우연히 느낀 시원한 물줄기의 감촉처럼 선물 같았던 쉼. 광장에 들어설 땐 이제 곧 앉을 수 있다는 생각 뿐, 광장을 나설 땐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을 생각 뿐. 이렇듯 배낭여행은 어느 시점엔가 관광보다 생존에 가까워진다.”
그랬다. 신행이었는데 배낭여행이기도 했다. 6박 8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네 개의 도시를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게다가 8월에 스페인이라니!! 너무나 무모해서 다시는 시도하지 않을, 그렇기에 아주 희소성 있는 값진 경험을 한 셈이다.
“밝아오는 새벽녘, 바르셀로나 산츠역 도착. 야간열차 쿠셋 안에서 우리 생애 첫 지중해와 만났다.”
야간열차의 낭만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두 칸이면 족했지만, 보안을 염려해 네 칸을 통으로 예약했다. 지중해를 향해 달리는 열차 안에, 단 하룻밤을 위해 꾸려진, 둘만의 신혼방이었다.
“몬주익 언덕, 밤이 되면 어둠을 배경으로 마히카 분수에서 매직 분수쇼가 열린다. 화려하게 조명을 받은 물줄기가 클래식 선율에 따라 솟구쳤다 가라앉으며 시각과 청각을 쉴 새 없이 자극하는데, 게으른 태양이 다 저물도록 인내해야 했던 수고가 몇 배로 보상되는 장관이었다.”
마지막 밤은 그렇게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신행 중 두어 번 다투었고, 그 두어 번 중 한번이 이 마지막 장관을 기다리면서였다는 것도 기억이 난다. 투닥거리고도 이내 곧 풀어지던 시절의 이야기.. 잘잘못보다 사랑이 늘 앞서있던 시절의 이야기.. 이기적인 본성을 거슬러 서로를 지극히 아꼈던, 그 시절로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들이 헤아려지는 밤이다.